[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참깨를 갈면서

  • 입력 2022.05.15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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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이른 아침에 트럭을 몰고 들에 가는데 읍내 네거리가 북적인다.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지나가는 차량이 보이면 얼굴이 무릎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있다. 유효기간 정해진 공손이 넘친다.

논 옆 갓길에 참깨를 파종하려니 작년의 아찔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귀엽고 앙증맞은 참깨꽃이 피면서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을 때 폭우로 4일 동안 물에 잠겼다가 녹아 없어져 종자도 건지지 못했다. 올해는 괜찮을지, 또 어떤 변수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지. 시련은 겉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옆구리에 불안과 걱정을 키우게 되는 모양이다.

남편은 트랙터를 몰고 나는 트럭에 비료와 비료살포기 그리고 참깨를 싣고 논으로 갔다. 일모작을 하는 논들은 물이 찰랑찰랑 채워져 있고 우리 논은 보리가 노랗게 익어가는 중이다. 겨울 가뭄으로 키가 덜 자라서 수확할 때 콤바인이 거둬 올리지 못하는 이삭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남편이 비료를 뿌리고 트랙터로 흙을 치면 나는 뒤따라서 참깨를 뿌렸다. 벨트 지갑에 넣어둔 라디오 뉴스에서는 국제곡물 가격이 날마다 오르고 있다고 전한다. 축산 사료를 비롯한 짜장면이나 라면까지 가격이 올라서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라고들 한다. 정작, 우리나라의 낮은 식량자급률 때문이라는 진실은 거론하지 않는다. 식량의 70%이상을 외국에서 사오기 때문에 해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외부 환경변화에 따라 널뛰기하고 있는데.

참깨를 뿌리면서도 자꾸만 보리에 눈이 간다. 20여일 후에는 수확할 수 있는 보리가 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재배과정이 밀과 보리는 한 치도 다르지 않은데 보리는 잡곡으로 팔 수 있지만 밀은 팔 데가 없어서 보리를 파종한다. 게다가 보리는 소비되는 범위가 좁아서 소비량이 약간만 웃돌아도 헐값이다. 재배한 밀을 팔 수 있다면 올 가을에라도 보리 대신 밀로 바꿀 수 있을 텐데. 주변의 일모작 하던 농민들도 적정 가격만 받쳐진다면 언제라도 밀 농사를 시작할 테고.

쌀을 비롯한 밀 옥수수 콩이라는 주요 식량작물은 생산비가 적게 든다. 그런데도 비용과 노력을 많이 쏟아야 하는 과일이나 채소에 몰려다닐 수밖에 없다. 식량작물만 키워서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하지만 몇 가지 경제작물에 치중된다. 땅이 있고 부지런한 농민들이 있는데 식량이 부족하다. 비교우위론에 바탕을 둔 자유시장경제를 열심히 따라한 결과다.

이 와중에 쌀이 남아도니 5%를 감축해야 한다면서 농민들과는 아무런 협의 없이 정부 혼자서 중얼중얼 하고 있다. 쌀농사로 얻는 소득을 대체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제왕시대의 상징이 되어 있는 청와대는 들어가지 않고 국민들 가까이 있겠다며 외교부 청사를 내놔라 국방부 한쪽을 비워라 하며 취임도 하기 전에 진짜 제왕 노릇을 시작한 대통령 당선자는 엉뚱한 곳에서 헛심을 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외의 나라에서 밀과 옥수수를 확보해야 한다며 우왕좌왕을 반복하는 것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세계은행에서 발표하기를, 식량 가격이 1% 오를 때마다 1,000만 명이 빈곤에 빠진다는데 노후까지 완벽하게 준비해둔 사람은 별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나 같은 사람들의 삶은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때그때 화풀이를 하지 않고 내내 참기만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듯이 요즘의 날씨가 그렇다. 한참을 가물다가 한 번 비가 쏟아지면 그대로 폭우가 되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 참깨를 갈면서 참깨 씨앗보다 굵은 걱정과 불안도 함께 파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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