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 입력 2022.05.01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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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요즘 많이 듣는 얘기가 “농촌에서 살면 외롭지 않아? 심심하지 않아?”라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받고 나면 농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다시 생각해본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던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그도 그럴 것이 농촌에서의 삶은 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거의 없다. 특히 요맘때 나의 일과는 창밖으로 동이 터오면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장화를 챙겨 신고 밭으로 나가 얼마전에 심은 작물들을 둘러보는 일로 시작한다. 감자는 싹이 올라오는지, 옥수수는 잘 크고 있는지 살피다 보면 붉게 올라온 작약 꽃대까지 구경하게 된다. 그렇게 밭 주변을 기웃거리다 보면 퇴비 넣어주시고 밭 갈아주신 이장님댁, 비닐 멀칭 같이 해준 부부, 하우스 없는 나 대신 옥수수 모종 키워주신 동네 아주머니, 약 하나 안치고 가꿔놓은 좋은 땅을 선뜻 빌려주신 땅주인집 부부가 오며 가며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 주신다.

일을 하고 있자니 귀농하신 부부가 시원한 음료를 타서 내오신다. 밭 한 고랑 농사 지어보고 싶다 해서 선뜻 내드리고 옥수수 씨앗 한 줌 드렸더니 갈 때마다 그렇게 챙겨주신다.

귀농 6년 차인 나는 이렇게 농사를 배워왔다. 콩알을 한 알씩 심는지 두 알씩 심는지, 땅에 바로 심는지 모종 키워 심는지, 비닐 씌워야 하는지, 물은 줘야 하는지, 몇 월에 심는지, 수확은 어떻게 하고 까불리기는 어떻게 하는지 경험이 없던 나는 오가는 분들에게 농사를 배웠다.

귀농·귀촌하려면 필수라는 교육도 다 받고, 자격증까지 따서 땅 임대하고 호기롭게 농사짓는다고 나섰는데 막상 밭에 들어서면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매번 만나는 어른들마다 묻고 부탁해 가며 6년을 지냈다. 이제는 나도 조금 안다고 이제 막 귀농하신 분들을 만나면 신이 나서 돕곤 한다.

얼마 전 건넛마을 할아버지가 건넨 결혼선물은 직접 만드신 물레 공예품이었다. 물레 손잡이를 돌리면 그 손잡이까지도 따로 돌아가는 것이 꽤나 정교하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드시냐며 감탄하니, 예전에 솜씨자랑대회 나가서 상을 탄 작품이라고 하시며 어릴 땐 사는 게 없이 다 만들어 썼노라 하신다.

오늘 농산물 판매장에 놀러 온 분들의 대화 주제는 어제 옮겨심은 내 옥수수 모종이다. 간밤에 비 소식이 있어 부지런히 심었으니 가물어도 괜찮겠지 싶었다. 그런데 어르신이 “아침에 흙을 헤집어 보니 먼지가 폴폴 나더라. 이렇게 가물고 더울 때는 모종을 심을 때도 세 손가락으로 꼭 눌러 공기를 빼주고 흙으로 북을 줘야 수분이 조금 덜 날아가는 거야”라고 하신다. 아… 오늘 저녁에 물통 메고 나가서 한 바가지씩 물 주고 흙 덮어줘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며칠 전, 평생 농사지으며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수퍼집 아주머니가 신문에 내 글이 실린 것을 보셨다며, 밭에서 일하는 나를 보더니 “글은 언제 써? 왜 땡볕에 나와서 이러고 있어. 이런 일은 우리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거야. 넌 가서 글이나 써”라며 안타까워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맴돈다. 농촌에 들어와서 아는 것 없어 일일이 물어보고, 어르신들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아내기가 힘든 어리숙한 내 눈에 이 어렵고 대단한 일을 척척 해내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져 보이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다.

농촌에서의 시간은 정말 금쪽같다. 일 분 일 초가 지날 때마다 정보가 쌓이고, 경험을 통한 지혜가 늘어간다. 이미 데이터화된 지식들이 얼마나 많겠냐만은 삶에서 필요한 순간 순간에 그게 뭔지도 모르는 것들을 알아서 툭툭 꺼내어 보여주시는 그 분들을 뵐 때마다 정말 존경스럽다.

그러다 문득 지금은 있지만 앞으로 10년 후에, 20년 후에는 사라질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이 사람이든 환경이든 자원이든, 나는 그동안 지속되어 온 것들 덕분에 이렇게 잘 적응하고 도움받으며 잘 살고 있는데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얼마 전까진 푸르던 산이 오늘은 다 허물어지고 집 몇 채가 들어섰다. 10년 후까지 우리집 앞산은 남아 있으려나….

나는 오늘도 혹시나 내일이면 사라질지 모를 귀한 유물들과 함께 살아간다.

오늘 밤에는 옆 동네 친구들과 별밤에 산책을 해야겠다. 저 별들도 사라질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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