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농촌 워맨스(woman romance)

  • 입력 2022.04.17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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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네가 있어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유일한 동네 친구가 가끔 던지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에도 각자의 집에서 큰 문제없이 살고 있었지만, 그 친구와 같은 해에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마음을 터놓고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되면서는 그 전엔 외롭고 쓸쓸하여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의지를 하게 되었다.

시가에서 어머님도 그러셨다. 비가 오거나 농한기에는 아무 때고 동네 지인분이 마실 오셨고 주거니 받거니 가족들과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다. 시장도 같이 가시고, 놀러도 다니셨다. 무시로 농산물과 음식을 나누셨고, 아플 때는 멀리 있는 가족보다 나았다.

얼마 전에 작은 수술을 하고 나니 친구가 꽃다발과 갓 만든 반찬, 국을 조달해주었다. 배우자는 그 친구에게 나만큼이나 고마워했다. 예전부터 친구들을 좋아해서 아무리 바빠도 친구를 만나러 다닐 짬은 만들었는데, 지금은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우선순위가 되어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영 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눈치를 챘다. 방금까지 나에게 잔소리하던 마녀가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할 때는 그렇게 반갑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하다니 아이들은 자기들보다 친구가 좋은 거냐고 묻는다.

우정은 확실히 나 자신을 되찾게 한다. 가족 안에서 엄마, 며느리, 아내라는 역할로 존재했다면 친구와 있을 때는 내 이름 석 자, 나 자신으로 불리운다. 그런 해방의 순간이 때때로 얼마나 낯설던지, 시골에서 결혼한 여성이 되고 보니 이렇게 갇혀 사는구나 스스로도 놀란다. 밭에서 농사짓고, 집에서 살림을 책임지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여성농민에게 우정은 사치일까? 그럴 리가. 자매애는 시골에서 약자의 삶을 지탱하는 밧줄이 되곤 한다. 특히나 친정이 없거나 멀리 있는 기혼 여성의 경우 주변 여성과의 우애는 척박한 가부장제 환경에서 서로의 건강과 살림을 챙겨주는 돌봄 연대체다. 더구나 또래 동성 친구는 단지 비슷한 처지에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한 뒷배가 되고 구구절절 설명 없이도 찰떡같은 교감이 가능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농촌에는 이러한 관계망을 형성할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나도 거의 포기하다시피 지내다 무려 8년 만에 동네 친구가 생겼으니 말이다.

농촌에 연령대별 인구구성 비율 균형이 깨진 지는 오래되었다. 지역에서 토종씨앗 모임이나 생태교육 모임을 하고 있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는다. 젊은 여성들은 어디로 가는가. 사회운동은 쇄신이 생명이라지만, 농촌에서 여성농민으로 간신히 살고 있는 경험으로 새로이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무슨 비전을 공유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청년여성농민들에게 농촌은 경제적인 문제와 함께 고착화된 성차별 문화에 대한 한계로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내가 귀농할 때 가장 먼저 닥친 문제는 살 집과 일할 밭이었지만, 사실 마음 맞는 벗이 없었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올라왔을지 모를 일이다. 나와는 또 다른 목적과 방법, 경력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기에 농촌에서 고립되지 않고 새로운 땅과 집에 연결될 수 있었고, 또 다른 이들과 네트워크 할 수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과도 보다 쉽게 벽을 허물었고, ‘우리’라는 울타리가 있어서인지 지나친 간섭은 적당히 삼가셨다. 이렇듯 비빌 언덕이 되어 서로를 키웠다.

한편으로 나는 친구와 타지역으로 퍼머컬처나 농민 육종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영국의 작은 전환 마을도 같이 다녀오는 등 지역에서 친구들과 때가 맞으면 함께 공부했는데,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 배움의 경험은 처음엔 의도하지 않았지만 개인 학습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한 동네에 비슷한 주제를 연구·실험하려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실제 경험하고 배운 바를 토대로 현장에서 구체화하고 적용하여 기존 마을 관계 지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이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지금 여기서 푸성귀와 밥상을 나누는 친구, 손님도 가족도 아닌 내부의 경계를 허무는 이웃의 우정을 통해 가부장제 문화는 결이 달라짐을 느낀다. 정녕 취향과 가치관이 맞는 동료의 존재는 여성농민의 정신 건강과 사회적 지위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에, 사랑과 가족을 초월하여 미래에 할머니들이 나누는 막역한 우정의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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