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봄, 은밀한 사생활을 위한

  • 입력 2022.04.10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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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인간의 역사는 종종 뒷걸음질을 하지만 자연의 움직임은 언제나 영락없다. 온도와 습도가 적절해지면 예상대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민들레 씨앗 하나가 움트려고 흙을 밀어올리는 힘이 자동차 바퀴의 공기압과 견줄 정도란다(<전략가, 잡초>, 이나가키 히데히로).

트럭을 운전하며 밭에 가는 길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고 산에는 진달래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대파를 심기 시작하느라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고 덜 삭은 퇴비 냄새는 먼 데서부터 마중오더니 또 멀리까지 배웅해준다. 일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까지 합쳐지면서 들판이 들썩 들썩인다.

대파를 심으려고 일꾼들과 비닐을 씌우고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데 밭 위의 산에서 자꾸만 나를 부르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남편이 버젓하게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 사뭇 조심스럽다. 나지막한 속삭임이 은근히 더 자극적으로 들려서 슬쩍슬쩍 소리 나는 곳으로 눈길을 주다가 얼른 시선을 돌리곤 했다.

10여 년 전쯤 대파를 갈아엎었을 때였다. 나만 겪는 고통이 아니고 대파를 심었던 농민이라면 다 같이 견디고 있는데 꼴사납게 질질 짜지 말자, 내년에는 이런 어이없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겠지, 하룻길만 걸어도 개도 보고 소도 보고 하물며 뱀도 보게 되지 않던가 하면서 허공에서 맴도는 정신머리를 다잡곤 했다.

그러나 정작 복병은 대파와 함께 트랙터에 잘게 찢어진 비닐이 골칫거리였다. 다음 농사를 지으려면 비닐 조각을 주워내야 했다. 숟가락보다 크거나 작은 비닐 조각을 주워 담는 행위가 일 같지도 않으면서 상처에 소금물이 닿는 듯 깜짝 놀라게 아프고 쓰렸다. 도무지 마무리할 수 없는 일감 같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맥이 풀려 멍하니 밭 위의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러 명의 여자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하면서 고사리를 꺾고 있었다. 농사일이 바쁜 사람들은 밭도랑 너머 고사리를 꺾을 새가 없지만 농사와 무관한 읍내 여자들일 터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넋 나간 채 앉아서 미치느니 차라리 산이나 쏘다니며 미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작정 산으로 올라갔다. 갓난아이 손 오므린 것처럼 생긴 고사리가 보였다. 하나씩 꺾다보니 고사리를 담을 포대가 필요해졌고 한 자리에 두세 개의 고사리가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횡재를 한 것처럼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새끼손가락만한 두께에 한 자나 길게 자라있는 고사리를 발견할 때는 고마움이 저절로 생겼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사리를 찾아다니다보니 비료포대가 가득 찼다. 무거워서 포대를 머리에 이고 산을 내려오는데 수십일 동안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이 어찌나 매력적이었는지 이맘때만 되면 혼자서 설렌다. 고사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남편 몰래 밭 위의 산으로 간다. 무릎 아프다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냐, 농사일 할 때는 무릎이 아프고 고사리 꺾을 때는 안 아프냐고 지청구를 할 게 뻔하기 때문에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농사꾼에게는 휴일이 따로 있지 않아서 날씨만 궂지 않으면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일감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어느 순간 내 삶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헷갈려서 먼 산을 바라보게 된다. 숨통을 트일만한 무엇이 절실할 때가 있다.

오늘 대파를 심고 나면 고사리 꺾으러 갈 수 있다. 내 다리는 이미 충전을 마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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