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농민회에 발을 들일 때 생각이 난다. 농사란 것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호기롭게 활동을 하였다. 제주 제2공항 반대 투쟁이 한창이었고 그 안에 농민회도 함께 있었다. 농민회는 제주 제2공항 부지내에 농지가 50만평이 포함되어 있어 농지 사수를 외치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회원 몇 사람과 술자리를 하며 농지 임차에 대해 논쟁을 하였다. 그때까지 알지 못한 사실. 우리 회원 중 다수가 임차농이며 임대차계약서도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 농민 대다수가 그런 실정에 놓여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불법적 농지 소유를 얘기하며 투기 목적의 농지 소유는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당신은 지금 농민들의 현실을 잘 모르고 원론만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대로 하면 자신들은 다 쫓겨날 것이고 더이상 농사지을 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그들은 아주 심각하고 격앙되어 있었다.
몇 년이 흘러 한국토지주택공사(LH)사태가 터지고 농지투기가 사회 이슈화되면서 농지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에서 농지대책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불법 농지를 직접 찾아보자고 한 것이다. 그리고 위원장을 필자한테 맡겼다. 많은 고민이 되었다. 몇 년 전 술자리에서 논쟁을 했던 그때 회원들의 심각한 얼굴과 말이 생각 난 것이다.
전국적으로 같은 현상이겠지만 제주의 농지는 투기세력의 소유로 많이 넘어가 있는 실정이다. 이 투기세력 밑에서 우리 농민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임대차계약서도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어떤 농지는 임대차계약서는 물론, 임대료도 없다. 그냥 무상으로 임대를 해주고 농약과 비료는 임대인 명의로 사주면 된다.
농민들은 이들이 정말 고맙다고 한다. 임대료도 받지 않고 무상으로 밭만 잘 관리해 주면 된다는 조건.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이 정말 고마운 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를 만큼 오른 그 비싼 농지를 무상으로 빌려주다니. 그리고 그 지주들에게 임차농들은 제발 가짜농부라는 단어를 쓰지 말았으면 한다는 당부도 한다.
과연 우리 농민들은 그들에게 고마워하며 임대차계약서도 없는 대리농 형태의 농사를 계속 지어야 하는가. 그들은 단지 농지를 투기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으며 위법을 합법으로 가장하기 위해 우리 농민들을 이용할 뿐인데, 어떻게 해서든 8년이라는 자경기간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대리농이 필요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을 농민들이 알면서도 모른척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농지가 나중에 농민들이 다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으로 남게 될까. 아마도 그 땅은 농민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가격의 땅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용이 되거나 농민이 아닌 다른 투기세력에게 넘어가 있을 것이다.
우리 농민들은 미래를 얘기한다. 거창한 농업·농촌·농민의 삶을 얘기하고 국민의 안전한 먹거리를 얘기하며 더 나아가 우리 미래 자식들의 먹거리를 얘기한다. 하지만 그 얘기의 기초는,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는 농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기세력에게 다 넘어간 후 우리 농민들은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그 고마운 투기세력들이 평생 우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밭을 내어줄 거라 믿고 있는 건 아닌가? 지금 평당 1,000원 했던 밭 임차료가 3,000원까지도 가고 있다.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 일부 농민들의 생각도 변해야 한다. 더이상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농지를 찾아다니는 일은 없게 만들자. 그들은 고마운 분들이 아니라 단지 불법을 저지르는 투기세력일 뿐이며 가짜농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