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자기만의 밭

  • 입력 2022.02.20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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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긴 겨울방학에 이어 봄방학마저 끝나간다. 코로나로 아이들은 집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 이렇게 지겨울 수가. 학부모로서 심신이 고갈되고 있다. “엄마, 저 좀 봐봐요”, “엄마,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엄마, 간식 뭐에요?”, “엄마, 엄마, 엄마!!” 내 눈·코·입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나는 늘 집에서 아이들에 의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스위치를 수시로 꺼야 한다.

아이들 방학이 곧 엄마 개학이라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내 일을 기꺼이 미뤄두는 것이 엄마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자질인 듯하다. 아이들이 학교나 어린이집에 가거나 잠자는 시간이 때로는 반갑게 느껴지는 것이 이기적이고 나쁜 엄마라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드는 마음이라고 생각을 바꾸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사실,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하더라도 “엄마 나빠”라는 말을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듣게 된다. 나름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는 편인데 아이들에게는 질서와 예의를 일러주는 엄마가 그다지 좋은 사람이 못 되는 모양이다. 어쩌겠는가.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질서를 깨고, 정리한 것을 어지럽히고 조용함을 쿵쾅거림으로 응답하는 반동의 기질과 특권이 있는 것을.

이런 나도 밭에만 가면 아이들 생각은 싹 잊어버렸다. 뜨거운 볕 아래에서 작물을 지키는 게 몸은 힘들어도 오히려 그 시간이 얼마나 편한지 농번기가 벌써 그리운 형편이다. 자유의 몸이 주는 여유, 그런 시간은 아쉬울 정도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챙겨주러 가는 마음은 또 얼마나 애틋한지, 아이들과 나는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며 재회하곤 했지만 그 마음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1시간이 될까. 우리는 다시 혼돈의 카오스로 나아갔다.

아버지가 아닌 형제들을 부르짖는 남성농민가에 반해 여성농민가의 농민은 자매가 아닌 어머니 정체성이다. ‘자식치고 곡식치는 땅의 어머니, 저 억센 땅에 씨를 뿌리는 세상의 젖줄’ 등 여성농민가의 가사에는 한편으로 ‘여성이면 본능적으로 아이를 잘 돌봐야 하고, 엄마 역할에서 기쁨을 느끼고 마땅히 헌신해야 한다’는, 가부장제에서 모성 신화에 갇혀 희생과 헌신을 유독 강요받는 여성농민의 고충이 있다.

여성농민이 다 남성의 배우자가 아니고, 모두 누군가의 어머니는 아니다. 지긋지긋한 가족관계에서 여성농민이 저항해 나가야 할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농민을 가부장제에 종사하는 사람으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여성농민은 흙의 사람이고, 여성농민이다.

그렇지마는 나도 어렸을 때 ‘엄마’를 우리 엄마로만 생각했었다. 엄마 이전에 당신을 보지 못했고, 그녀 고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음을 딸로서 애석하게 느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 역시 도돌이표인 듯하다. 엄마 이전에 내가 습득한 삶의 기술과 지식은 육아와 함께 도통 쓸 일이 없어졌다. 내 깊숙한 능력 창고 안에는 거미가 신나게 집을 짓고 있다. 아이들에게 뽀뽀하느라 내 입술은 닳아가지만, 내 좌뇌는 녹슬고 있다.

돋우고 뛰어야 복사뼈라고 기혼·유자녀·여성·농민인 나 역시 이상적인 모성 환상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라는 역할에 맞게 기꺼이 내 사회적인 업무들은 늘 뒤로 미루거나 잘라냈다. 올해 초에도 이미 마을학교 선생님을, 지역에서의 농사 관련 수업 제안 등을 아직 셋째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사절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좁히고 좁힌다. 작게 농사만 지어도 어디냐 하며.

올 한해 농사 계획을 마무리하고 씨앗을 준비하는 2월, 입춘을 성큼 지나 추위가 누그러지는 절기에 이르러서야 봄맞이를 서두른다. 아이들이 한 해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니, 올해 심을 씨앗 챙기는 마음은 더욱 애틋하다. 성인이 되기까지 오랜 기간 책임을 지고 공을 들이는 육아에 비해 한 해에 시작과 끝이 있는 농사는 노동 강도가 크지만, 그만큼의 결실을 가져다주니 그 보람과 재미야말로 여성농민에게 치유 농사가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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