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대선을 앞두고

  • 입력 2022.02.13 18:00
  • 기자명 이희수(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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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경북 봉화)
이희수(경북 봉화)

가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시간은 언제였을까, 스스로 묻고 답을 구할 때가 있다. 물론 단 한 시간만 고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점심시간이 행복한 모습으로 자주 떠오른다. 한 학년을 모두 합쳐 겨우 스무 명 남짓했던 시골 학교 남자 아이들은 점심을 먹기가 무섭게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축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집이 학교에서 가까웠던 나는 도시락을 싸는 대신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와야 했다. 아무리 빨리 집에 달려가서 급하게 밥을 먹고 오더라도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들과 내가 동시에 축구를 시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다보니 늘 뒤늦게 운동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대부분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지만, 어떤 날엔 집에 다녀오는 사이에 이미 균형이 무너져 승부가 한쪽으로 기울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 운 좋게 이기고 있는 편에 들어가서 손쉽게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꽤 달콤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지고 있는 편을 선택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힘겹게 역전승을 얻어냈을 때의 기쁨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찾아왔다. 누군가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지만, 지금까지 체감한 선거란 결국 어느 한 편을 위한 일방적인 편들기와 다르지 않았다. 내 편의 허물은 감추고 경쟁자의 허물은 최대한 크게 드러내고, 상대의 자랑은 축소하고 나의 자랑은 최대로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 되는 선거운동 과정은 선수가 아닌 관전자 입장에서는 참 재미없는 구경거리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세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사회의 전면에 나섰던 경험이 없는 농민들은 이런 극단적인 편들기가 몹시 부럽다.

소멸위기에 몰린 농촌현실을 평소엔 외면하다가 뒤늦게 표심을 잡기 위해 장밋빛 공약을 쏟아내는 후보들이 야속하지만, 이 중에는 귀가 번쩍 떠지는 공약들이 많다. 3% 이하로 떨어진 농림수산식품 분야 예산을 국가 예산의 5%로 확대하는 것도 무척 반길 일이고, 무엇보다 농업을 식량안보 산업으로 육성하고 국가의 식량자급 목표를 60%로 끌어올리겠다는 약속엔 감기던 눈까지 번쩍 떠진다. 무분별한 농지전용에 제동을 걸고, 먹거리 기본법 제정, 취약계층의 긴급 끼니돌봄 제도 도입, 유전자변형식품(GMO) 완전표시제도 도입도 반갑기 그지없다. 또한 마을 주치의 제도 도입, 농업직불금 2배 확충 등도 무척 솔깃한 공약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 같은 공약이 실현되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까지 농민들이 딛고 살아온 현실은 급격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극단이었다. 절벽처럼 기울어진 경기장의 한 쪽 편을 들어올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할 때도 있을 터인데, 이것은 결국 후보자의 세계관과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은 맥이 풀린다. 공약은 벼락치기 학습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처럼 불평등이 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넘쳐나는 나라에서 공동체의 리더가 갖추어야 할 절박한 덕목은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참모의 조언이 없이도 직관적으로 느끼는 감수성일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점심시간, 나와 친구들이 누렸던 한 시간의 행복은 최고 학년의 권위로 운동장을 독점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학년에서 5학년 학생들의 원치 않은 양보와 희생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행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내 몸뚱이가 등 따시고 배부른 상태일지라도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힘겹게 하루를 버티는 타인의 처지를 감지하는 감수성, 세상의 구석 구석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면서도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이들의 슬픔을 헤아리는 감수성은 모두에게 다른 어떤 재능보다도 중요하다. 이번 대선이 농민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일방적인 희생이 없이도 행복이 가능한 사회로 가는 과정이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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