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택배는 사연을 싣고

  • 입력 2022.01.30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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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2017년 귀농을 결심하고 실천할 당시, 도시의 친구들은 내가 농촌에서 3개월 이상 버티면 성을 바꾸겠다고 장담하곤 했다. 도시는 물론, 해외까지 나가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내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찰 것인데, 심지어 시골살이를 자처하는 것을 보고는 못 견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친구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어느덧 나의 귀농 생활은 5년이 넘어가고 있다.

매년 여름 찰옥수수를 삶아서 팔기 위해 파라솔이나 천막을 치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옥수수 장사 경쟁이 심한 동네에서 끊임없이 시비가 걸리는 탓에 작년 여름 정식으로 농산물 판매장을 지어 가을에 개업을 했다. 쉽지 않은 각종 허가를 받고, 사업자를 내고 다행히 현재도 영업 중이다. 첫 달에는 개업턱을 보느라 분주했지만, 점점 손님은 뜸해지고 겨울이 되면서 캠핑족과 골프장을 오가는 관광객들도 뜸해졌다. 농산물은 수확철에 따라 반짝 판매가 되기 때문에 매달 지출해야 하는 고정비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이 되던 차에 거래하던 택배기사님이 취급점 제안을 해오셨다.

농촌 마을에 배정된 기사 한 분이 집집마다 다니며 택배 송장을 받기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닌 것이다. 농촌에서 택배 보내는 일이 그렇게 큰 어려움일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어르신들이 손수 키운 농산물을 도시의 자녀들에게 보내기 위해서 우체국까지 가려면 차가 없이는 불가능하고 대중교통은 더욱 어렵다. 그동안 몇몇 분이 택배를 담당하셨는데 컴퓨터 다루는 것이 익숙지 않아 택배 한 번 보내려면 20분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하고, 배송지 입력이 잘못되어 반송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젊은 사람이 가까이에서 택배를 취급한다는 게 꽤나 반가운 일이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고정적인 매장 운영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택배 접수 일이 어느샌가 너무 즐거운 일이 되었다. 한번은 80을 훌쩍 넘기신 할아버지 한 분이 아랫말에서 몇십 년은 타신 듯한 경운기를 타고 오셔서 택배를 받고 있던 중에, 윗말에서 같은 연배의 할아버지가 몇십 년은 타신 듯한 비슷한 경운기를 타고 오셨다. 친구인 아랫말 할아버지의 경운기를 보고 반가워서 들어오셨단다. 그렇게 두 분은 차로 10여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사시면서도 몇 년을 못 보다가 오랜만에 만나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우셨다.

어느 날은 이른 아침 열지도 않은 가게 문 앞에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계셨다. 전날 밤부터 핸드폰이 이상해서 발을 동동 구르다 오셨다고 했다. 차가 없는 어르신은 핸드폰대리점이나 수리센터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우리 매장이었다고 한다. 막상 핸드폰을 살펴보면 버튼 몇 개로 쉽게 고쳐질 일이었지만, 어르신들은 당황스럽고 막막하셨을 것이다.

최근엔 인터넷 구매 대행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필요한 물건에 대해 설명을 듣고, 검색해서 안내해드리고, 선택하시면 구매해 드린다. 조립 또는 설치를 해드리기도 하니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른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시간에 오신 어르신들은 물건을 내려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신다. 누구네 총각이 장가가던 날 가마 탄 이야기며 누구네 집에 소 키우던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나의 필요로 지은 농산물 판매장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택배 취급점을 운영하면서, 저마다의 사연도 함께 접수하고 있다. 택배 물건이 오면 이야기가 함께 오고, 그 속에 사람이 있고 관계가 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려고 한다. 그러는 중에 내 가게는 만물상이 되기도 하고 심부름센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자꾸 고민하게 된다. 어르신들의 발이 되어줄 대중교통이 어떻게 하면 복지로 제공될 수 있을까, 손수레에 20kg 쌀 박스를 끌고 오는 할머니가 집에서 택배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마을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 힘든 어르신들을 한 번씩 모셔서 어울림 마당을 벌일 수는 없을까….

나는 이런 나의 삶이 행복하다. 그저 내 일을 할 뿐인데, 농촌마을에서 청년으로 산다는 이유로 얻게 되는 관계와 보람이 감사하다. 그렇게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택배를 보내며 오늘도 나의 삶은 생생한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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