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나는 형수?

  • 입력 2022.01.23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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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일전에 지인들과 함께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인지라 굳이 소개를 안 해도 되었지만, 여럿이 모인 자리인 만큼 각자 가지고 있는 콩알만 한 직위라도 소개하며 공적인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KF94 비말 차단 마스크를 야무지게 쓰고서 말입니다. 하필 그날은 남편과 동행한 자리였는데, 진행자가 부부 중 한 명만 인사를 하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남편이 외부활동이 많은 내게 양보를 했기에, 마이크를 넘겨받고서는 분위기에 맞다 싶은 몇 마디로 인사를 채웠습니다. 짧은 인사 후 진행자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돌아서는데 ‘형수님’이 수고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 비슷한 류의 인사를 했습니다. 형수?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진행자를 또렷이 쳐다봤습니다. 나의 눈에서 안풍이 나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진행자가 재빨리 실수였다고 고쳤는데 저는 이미 마음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요즘 나의 이력을 보자면 생애 최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아 물론 그래서 어느 것도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단 여기서 초점은 자리만 국한해서 볼 참입니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슬쩍 꿰찬 자리가 아니라 30년 가까이 내내 있던 자리에서 비슷비슷하게 크고 작은 자리를 맡아 일을 해왔는데, 뜬금없이 형수로 모든 것을 퉁 쳤습니다. 굳이 나를 알아 달라는 요구는 당연히 아닙니다. 나의 공적인 직위가 사라짐과 사적 관계 부각의 상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서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라지요? 그것을 집단주의나 개인주의가 아닌, 관계주의라고 명명하며 그 독특한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말을 합니다. 물론 장단점으로 보지 않고 특징이 그러하므로 칭찬이나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렇고 말고요, 오랫동안 쌓여온 사회적 기질을 근본 없이 평가하기보다는 특성을 이해하며 그를 기반으로 접근하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이렇게나 관계를 소중히 하는 민족이다 보니 유독 관계에 따른 호칭도 발달했답니다. 남형제, 여형제로 일괄하는 영어와 달리 누나, 오빠, 형, 아우 등 친동기간의 호칭은 물론이고 삼촌, 당숙, 재종 형 등 촌수에 따른 칭호도 갖가지여서 그것을 제대로 공부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공적인 자리에서 형수로 불리는 것은 대체 무슨 일일까요? 그렇게 불러도 아무렇지 않은 청중들의 반응은 또 뭘까요? 그렇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눈에서 안풍을 쏘는 사람의 까칠함이 문제인가요? 그렇지요? 호칭에도 가부장성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의 공적인 지위나 역할보다 자리에 있는 남성의 관계 중심으로 정리된 호칭을 부르는 관행에 가부장성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아 물론 한발 더 나아가서 남편의 친동기에게는 아가씨나 도련님, 또는 아주버님이라는 고유한 호칭에 ~님까지 붙이면서, 아내의 친동기에게는 처형, 처제, 처남 등 관계가 곧 호칭이 되는 인색함이 싫다고 젊은 여성들은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바뀐 세상대로 호칭이 정리되고 있지만, 관계를 남성 중심으로 놓고서 호칭을 하는 문화는 여전히 그대로인 장면이 많습니다. 뜬금없는 실수에 담긴 무딘 성 감수성을 통찰하며 성숙해지는 새해, 설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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