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그녀의 삶이 내 삶이거늘

  • 입력 2022.01.09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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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얼마 전에,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여성농민들을 인터뷰하고 싶다며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농민의 ‘농’자 마저 거론하지 않는 매체들이 대부분인데 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는 여성농민을 굳이 들춰보겠다는 의지가 실로 가상하기까지 했다.

신문사 기자가 이쪽의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내가 통역사 노릇을 하느라 인터뷰 자리에 같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76세이고 논 500평, 밭 1,500평이 남편 명의로 되어 있다고.

결혼 전,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꿈이 무엇이었냐고 기자가 물었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라 눈 뜨면 끼니 해결이 발등의 불이었다. 산에 가서 나무껍질을 벗겨 오거나 들에 나가 풀뿌리를 캐다가 절구에 찧어서 끓여먹느라 하루해가 저물었다. 배곯지 않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기에 학교에 가서 뭘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 후에 생활은 결혼 전과 어떻게 달랐냐고 기자가 다시 물었다. 시부모에 시동생들까지 식구가 더 많았기에 일은 더 많이 하면서도 배는 등가죽에 붙어 있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젖 먹는 아이 궁둥이를 만져볼 새 없이 젖만 먹여놓고 들로 부엌으로 내달려야 했다. 게다가 남편은 시난고난 병치레를 했기 때문에 가족경제는 온전히 그녀 몫이었다.

자식들이 장성해서 일가를 이룬 지금은 취미나 뭘 해보고 싶은 것이 있냐고 기자가 물었다.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품삯 일을 하고 싶어도 고장난 허리와 다리가 허락해주지 않으니 일을 덜 하게 되었다. 할멈 영감 둘이 단출한 살림이라 논밭 일궈서 빚은 지지 않고 살게 되었다. 지금 가장 큰 바람은 어서 묏등으로 가는 것이다. 눈뜨면 들에 나가서 일을 해야 남편 병원비를 마련할 수 있고 밥 차려 시중들어야 하는 인생살이가 뭔 재미가 있어 오래 살고 싶겠냐고. 뭘 알아야, 하고 싶은 것이나 취미도 가질 수 있지 않겠냐고. 하아~! 기자와 나는 갑갑했다. 숨이 막혔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간에 그녀의 남편이 들어와서 소리를 쳤다. 무식한 여편네한테 들을 말이 뭣이 있다고 신문에 내서 집안 망신시키려 하느냐, 당장 집어치우라고 했다. 무식한 여편네의 수고 덕분에 목숨 부지하고 있는 사람의 기고만장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분홍빛 꿈을 꿔 본 적이 없었고 자신을 위해서 뭘 해보고 싶은 것이 없었다. 억울한 일이 있어 한 마디 내뱉고 싶어도 글자도 모르는 여편네가 감히 무슨 말을 누구한테 할 수 있겠냐고. 글자를 모르기는 매한가지인 소나무나 풀한테 하소연하는 것이 그녀의 편한 말동무였다고. 노인대학에서 글자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도 무용지물이었다. 무식한 여편네라며 아무 때고 무시하는 남편의 수발을 드느라 자신을 위해 아직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삶에 비하면 내 삶은 새 발의 피도 안 되지만 기회가 차단된 상황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녀가 문맹이라면 나는 디지털 문맹에 가깝고. 12월까지 대파, 배추를 가꾸느라 밤에 자는 시간 외에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키운 대파, 배추를 낮은 시세 때문에 팔지 못해서 심리적으로는 올해가 아직 시작되지 못했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를 맴돌면서 전전긍긍하느라 정신이 허방에 떠 있다.

자율시장에 맡겨야 한다며 팔짱끼고 있다가도 물가를 잡는다며 시장에 개입해서 농산물을 똥값으로 만드는 정책이 반복되는 한, 그녀와 나는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 수가 없다. 게다가 내 삶의 문고리를 쥐고 있는 농업정책은 현재보다 더 큰 물살을 예고하는 수입개방을 하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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