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혼자 있어도 안전한 공간에 대해

  • 입력 2021.12.19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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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귀농 초기 동네에 있는 허름한 빈 집을 구해 살던 시기에 한지 바른 나무틀에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촌집에서 여러 달 산 적이 있었다. 고요하고 깊은 어두움이 존재하는 농촌의 밤은 보통 고단함에 쓰러져 자기 바쁘지만, 동거인이 없는 밤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꼭 칼을 가까이 두고도 뒤척이다 잠이 들곤 했다.

‘사람이 제일 무서워’, 딱히 연고 없이 타지에 뿌리를 내린 씩씩한 언니들도, 동네 터줏대감 같던 할매들도 난데없이 마주치는 뱀보다 혼자 김매고 있을 때 등장하는 남자 사람에 더 겁난다고들 했다. 이 말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주변 여성농민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경험들이 축적된 무거운 말이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기에 씁쓸했다.

얼마 전 옆 동네에 혼자 사는 친구가 늦저녁에 전화를 걸어왔다. 개가 많이 짖어서 밖을 살피니 한 남성이 유리창을 기웃거리며 한참동안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더라며 화들짝 놀랐다고 했다. 경찰을 불렀으나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도착했다고 하니 그이가 겪었을 두려움에 몸서리쳐졌다.

또 한 친구는 배우자가 일로 외근하는 날에는 촌집에서 혼자는 무서우니 같이 잘 수 있는지 묻곤 했다. 나에게도 수년 전에 이웃 할아버지가 술에 만취하여 늦은 밤에 문을 치며 나오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기겁했던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아이와 함께 친구 집에서 같이 밤을 보냈다.

젊은 여자 사람만 그러한 두려움을 겪고 사는 것은 아니다. 처음 귀농한 터전의 이웃집 할머니에게도 그런 성범죄가 발생하였다고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가해자는 나와도 면식이 있던 평판이 있는 이웃동네 아저씨였다. 그 당시에는 범죄자도 피해자도 뜻밖이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범죄를 밝힌다고 했을 때, 누가 할머니의 말을 믿겠냐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수십년 된 농가 주택은 대부분 잠금장치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위험한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그만큼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지인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비율이 높은 현실이 문제다. 동네 사람이라서 범죄가 벌어졌을 때 가해자와 연관된 사람들의 2차 가해도 쉽게 생기고, 가해자 분리가 쉽지 않은 관계망이다.

한 공동체 마을에서 가해자를 그래도 품어줘야 한다는 네트워크와 피해자 보호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으로 마을 전체가 들썩인 적이 있었다.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집성촌을 유지하는 농촌에서는 성차에 따른 위계가 있어 공평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성폭력의 심각성과 대처방식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인식이 형성되지 않아 마을 자치가 제구실을 못했다.

문학이나 영화계에서 평화롭고 한적한 농촌 마을의 이미지가 반전되어 폐쇄적이고 고립된 공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어 왔다.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더 소름 돋는 효과를 갖는다. 타인의 고통에 모르쇠로 벽을 칠 때 간접적으로 차별에 동조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성역할을 뒤바꾸어 남성농민으로 산다면 이런 위태로움을 견뎌야 했을까.

농촌에서는 일하다가 따로 화장실을 가기 어려운 작업 현장이 보통이고, 홀로 계시는 할머니들이 많은 편이다. 더구나 증가하는 이주여성농민들의 존재에 비해 그녀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마을에서 쉽게 들을 수 없다. 가부장제 농촌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이 유독 낮다고 하는데, 이를 보완할 성평등 관련 교육의 기회는 극히 드물다. 여성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안들이 공론화되지 않고, 은폐되거나 그저 개인의 잘못이나 불운으로 돌려서는 끝날 일이 아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가지로 나뉘어 하위 단계가 충족되면 상위 단계로 나아간다고 했는데, 1단계 생리적 욕구 다음이 2단계인 안전에 대한 욕구이다. 이에 따르면 여성농민은 2단계의 욕구부터 결핍이 발생하니 최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으로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도어락이나 CCTV, 호신용품 등이 발전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방어하는 삶은 한계가 있다. 젠더 감수성이 깨어있는 지역 이웃의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될 때,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여성농민이 삶의 뿌리를 깊이 뻗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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