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메주를 쑤면서

  • 입력 2021.12.12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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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끝이 보인다. 나락타작을 마치자마자 보리갈이를 해서 싹이 나온 후부터는 일감이 느슨해졌다. 언제까지고 나를 쫓아다니며 닦달할 것만 같았는데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메주를 쑬 시기이고 그럴 짬이 생겼다.

장날 메주콩을 사러 갔다. 소매상 앞에 펼쳐 놓은 콩을 보니 세상에! 깨끗하게도 손질했네 싶었다. 소매상한테 콩을 판 사람이라면 분명 나와 처지가 비슷한 농사꾼이리라. 세수시켜 놓은 아이의 얼굴같이 해맑은 콩을 팔려고 몇 날 밤을 TV 앞에 엎드려서 콩을 골랐을까?

베어 놓은 콩이 많을 경우 콩 타작 기계를 기술센터에서 빌려서 활용할 수 있지만 자투리 농사일 경우에는 작대기로 두드려서 콩을 터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작대기로 콩을 털었다.

참깨나 들깨는 작은 막대기로 탁탁 때리면 알맹이가 쏟아지는 것과는 다르게 콩을 털 때는 지게 작대기 같은 것으로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면서 내리쳐야 콩이 쏟아졌다. 참깨를 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힘이 들었다. 게다가 집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꼬투리를 비롯한 쭉정이를 골라내야 한다. 낮에는 들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밤에 TV 앞에 밥상을 펼쳐 놓고 콩을 고르느라 휴식을 미뤄야 했다. 낟알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하룻밤에 해결되는 일감이 아니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어느 순간 꾀가 생겼다. 10만원 안팎이면 살 수 있는 콩을 수확하기 위해 봄부터 늦가을까지 안달복달 애쓴다고 사는 형편이 달라지지 않더라는, 효율성을 생각해봤다. 콩을 사서 메주를 쑤면 몸이 덜 고달플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자신이 영리해진 것 같아 대견할 지경이었다. 재작년부터는 콩을 산다. 콩 한 알도 심지 않는다. 20년 넘게 콩 때문에 고생한 생각을 하면 억울해서다.

화덕을 꺼내서 전날 불려 놓은 콩을 안치고 미리 주워다 놓은 장작에 불을 붙였다. 신문지와 종이박스를 한참이나 태우고 나서야 장작에서 불이 일어난다. 장작이 타고 있는 모양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묘하게 차분해진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모처럼 여유를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개뿔! 대문 안 구석구석 정리되지 않고 어질러진 일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눈을 감고 집을 들락거렸나 싶게 정신 사납다.

마트에 갈 때마다 크고 짱짱한 종이박스만 보면 눈이 번쩍 뜨여서 가져왔다. 지나치는 길에 깨끗한 아이스박스가 보여도 끌고 들어왔다. 많은 고양이들 월동준비를 여름부터 하느라고 집안이 재활용 쓰레기 집합소 같다. 텃밭은 더 가관이다. 1년 넘게 방치하면 이 꼴이 되나 싶게 풀이 텃밭을 장악했다. 워매워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틈날 때마다 풀을 뽑아서 풀씨가 떨어질까 무서워 논으로 갖고 가서 버렸는데 그동안의 성실이 조롱당한 것 같다.

화덕 안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을 힐끔힐끔 엿보면서 본격적으로 텃밭의 풀을 뽑기 시작한다. 이제 메주 쑤는 일은 덤이다. 텃밭 정리가 우선으로 바뀌어서 풀과 실랑이하다가 화덕 쪽으로 눈을 돌려 보니 솥뚜껑이 열려서 넘치고 있다. 엄마야 난 몰라! 혼자 외치며 뛰어가서 솥뚜껑 위에 물을 끼얹었다. 화덕 주변에 흘러넘친 콩물이 흥건한 것으로 봐서 솥은 진즉 끓었던 모양이다.

콩이 잘 물러지게 하려면 뜸 들이는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화덕 안의 큰 불은 끄고 끓어 넘치지 않도록 솥뚜껑 위에 물을 끼얹어가며 꺼지지 않을 만큼만 불 관리를 한다. 화덕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하지만 배추밭에서 물주고 있는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올 시간이라 다시 부엌으로 들어온다.

한 집안의 부엌이 식구들의 약국이요 병원이라는 일본 식품학자의 말이 내 생각이 되었다. 콩 한 말의 메주면 2년은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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