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농부의 11월

  • 입력 2021.12.12 18:00
  • 기자명 이희수(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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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경북 봉화)
이희수(경북 봉화)

북미 원주민들이 11월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물이 검어지는 달, 샛강 가장자리가 어는 달, 산책하기 알맞은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 많이 가난해지는 달 등에서 보듯이 이름 하나 하나가 매우 시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과 ‘많이 가난해지는 달’에 이르면 표현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농민들의 마음은 칼에 베인 것처럼 쓰라리다. 이렇듯 11월은 만물을 거두어들이지만, 더욱 가난해지는 농민의 현실을 일깨우는 뼈아픈 달이기도 하다. 게다가 11월 11일은 농민의 날이 아닌가?

올해 11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벼를 베고, 콩도 베고, 사과를 따고, 생강도 캐고, 서리에 삶기지 않도록 미리 밑둥을 꺾어두었던 고춧대에서 짜글짜글하게 말라버린 고추까지 알뜰히 거두었지만, 생산비용을 제하고 나면 농부의 통장 잔고는 그다지 불어나지 않는다. 도시근로자가구 소득 대비 농가소득 비율은 2003년 76%에서 2020년 62%로 현저히 감소하였다. 그나마 이 수치도 농가소득 중에서 농업외소득의 증가에 힘입은 바가 크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1970년에 1,000만을 훌쩍 넘었던 농촌인구는 꾸준히 감소하여 이제 겨우 200만 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농업 농촌 현실을 타개하고자 지난 11월 17일 ‘국민과 함께하는 농민의길’은 ‘전국농민총궐기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아직 들에는 농부의 손을 기다리는 일이 널려있지만, 신자유주의 농정을 폐기하고 농민기본권을 확립하는 체제전환과, 농업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농업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하는 사회대개혁 없이는 점점 심화되는 기후위기와 불평등, 모든 농업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는 절박함이 전국의 농민들을 여의도로 이끌었다.

그런데 전국의 농민들이 들녘이 아닌 아스팔트를 딛고 아직 이땅에서 농민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적폐농정을 갈아엎자고 농민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던 그날에, 홍남기 부총리는 쌀값이 지금도 비싸니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더 떨어뜨려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만약에 농민총궐기선언과 부총리의 발언이 우연의 일치로 같은 날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라면, 부총리는 참으로 많은 농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안겨준 것이다. 한 나라의 부총리가 식민지 백성에게 그런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해도 이는 지탄받아 마땅한 일일 것이다.

농산물이 물가상승에 미치는 영향이 공산품과 기타 서비스 분야에 비하면 미미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부총리가 농산물을 물가상승의 주범인 양 호도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치졸한 행위이다. 실제로 농산물이 물가상승에서 차지하는 가중치를 천분비로 나타내면 65에 불과하다. 반면 공업제품 가중치는 333, 서비스·기타 가중치는 551에 이른다. 정부 고위관료의 인식이 이러하니 우리나라 주류 언론은 덩달아서 농산물 가격이 조금만 올라도 ‘장바구니 물가 비상’을 운운하며 호들갑을 떤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한 나라의 고위 관료들과 주류 언론이 오랫동안 공동체에 양식을 제공하며 헌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면당해온 자국 농민을 벼랑끝으로 몰아가기 위해 이토록 애쓰는지,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금까지 애타는 농심을 외면하고, 농촌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농업의 위기와 기후위기를 불러온 생각이 저들의 협잡을 통해 힘을 길러왔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듯하게 속이고, 그럴싸한 논리로 꾸며서 이 나라 구석구석을 허물고 사회적 약자의 존엄을 짓밟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견디고,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이 땅 농민들이 북미 원주민들처럼 검어지는 물빛을 보며, 가장자리가 얼어붙은 샛강을 따라, 평화로이 산책하는 11월을 맞이할 수 있을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온 세상인데, 올해는 결실기에 유난히 비가 잦았던 탓에 고개 숙이지 않은 벼들이 많았다. 세상에 고개 숙이지 않고 하늘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저 쭉정이들의 결기야말로 오랫동안 쭉정이 취급을 받아온 농민들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알맹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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