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어떤 사업 계획서

  • 입력 2021.12.12 18:00
  • 기자명 김순재 전 동읍농협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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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재 전 창원 동읍농협 조합장
김순재 전 창원 동읍농협 조합장

 

 

11월은 거의 대부분의 농협들이 다음 해 사업 계획서를 논의해 결정짓는 시기다. 늘 그랬다.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해 그 다음 해 사업 계획서를 만드는 일은 농협만이 아니라 사업체 대부분에서도 그 절차와 형식만 달리할 뿐 거의 같다. 농협이 결산을 하는 정기총회를 앞두거나 다음 해 예산을 세우는 시기가 되면 주변 농민들에게서 연락을 종종 받는다. 농협들의 사업 계획서 혹은 결산서를 좀 봐 달라고 하는 것이다. 올해도 얼마 전, 어떤 농협의 대의원이 2022년 자기 농협 사업 계획서를 가지고 왔다. 그리 볼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대충 보았고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내년에 대통령선거가 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지방선거가 있다.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통해 행정조직은 골간 운영진들을 뽑게 돼 있다. 물론 내년에 집행할 행정부 예산은 올 12월이면 결정이 나지만 편성된 예산의 범주 내에서는 집행 책임자에게 일정 정도 전용할 권한이 있으며, 예산이 편성돼야 집행을 할 수 있는 기본 토대가 생기고 행정은 습관적으로 추경을 편성하지만 농협이 추경을 편성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또 대의원이 가져다준 농협 사업 계획서와 예산서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상당한 이익을 예측해 여러 경비는 늘려 잡았으면서 농민에게 지원하는 생산 관련 부분 예산은 축소돼 있다는 것이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모든 후보가 장밋빛 공약들을 내던질 건데 이 농협의 사업 계획서는 고리타분한 수준을 넘어 생산지인 농촌과 농업을 도외시하는 것 같았다. 지역 특성과 시장 변화를 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농협과 비슷한 수준의 사업 계획서다.

선거는 집행부의 변화를 뜻하고, 선거를 통해서 사소한 변화들이 일어나야 하는 데 오히려 그 농협의 사업 계획서는 전반적으로 퇴보하고 있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농민의 물음에는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우물거렸다. 차를 마시고 농민은 돌아갔고 나는 배추밭으로 나가서 일을 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째서 저런 사업 계획서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아서 배추 쪼개기에 헛 칼질이 많아졌고 일하는 내내 구시렁거렸다. “내 탓이다. 우리 탓이다.” 몇 가지 객관적인 사실은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건 시장을 위축시키건 △무역수지가 너무 좋다는 것 △세금이 많이, 잘 걷히고 있다는 것 △금융 기관들은 사상 최대의 흑자를 누리고 있다는 것 △2022년 편성될 예산안에서 농업 부분은 상대적으로 그 비율이 현격히 낮아졌다는 것 △잘하는 경우도 있지만 농민의 이익을 위해 최전선에서 일해야 하는 농협이 그리 열심히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등이다.

이런 이유들의 시작은 농업과 관련된 여러 조직의 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서 비롯됐다는 생각으로 내내 반성하면서 구시렁거리는 나쁜 태도로 오후 내내 배추밭에서 칼질을 했다. 어쩌랴 저 사업 계획서가 비단 저 농협만의 일이겠느냐?

‘어떤 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릴 먹여 살리겠느냐’는 이웃의 자조 푸념에 동의하면서도 스스로가 준비해 요구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농민은 어려워질 것이다. 선거가 있고, 선거라는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나아지기 위한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더욱 나빠질 가능성이 많기에 사업계획을 세울 때부터 좀 주도면밀해야 하는데, 그러한 노력이 없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가 안타까웠다. 세상은 변해서 이제는 길거리에 나가서 누워만 있어도 누구도 굶어 죽지 않을 세상이 됐다. ‘삶의 질’의 기본 보장을 요구하는 세상이 됐다. 이런 시기에 고리타분한 사업계획을 세우는 세력들은 좀 물러나게 해야 하는데 제 앞의 고리타분함은 용납하면서 정치권을 욕하기에는 부지런하다. 최근 들어서 사소한 강연도, 토론자리도 거절하고 원고 쓰기도 거절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나도 이미 기성의 세대고 현재의 여러 사안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여 주창했던 일들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이 시행되지 않거나 더디게 시행돼 가고 있는 것도 이제는 이미 기성의 세대인 내 책임이기는 하다. 도망이라고 보일지 몰라도 어떤 사업 계획서를 보면서 특별히 할 말이 없어 구시렁거리며 보낸 12월 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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