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신용있는 농민이고 싶어요

  • 입력 2021.12.05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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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부모님의 농장으로 귀농한 승계농 후배의 이야기다.

부모님 농장에서 한 달 품값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한 용돈을 받으며 일을 배우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나는 독립을 권했고 본인도 부모님과의 지속적인 갈등과 자기 미래를 고려해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의 꿈은 너무도 빨리 좌절됐다. 당장 자신이 원하던 기회가 마련됐음에도 후배는 당분간은 어렵겠다며 속상함을 토로했다. 독립 자금을 주시겠다고 했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부모님의 말씀에 알아서 해야겠다 싶어 대출을 알아봤는데 농업경영체등록증도 없고, 농수축협 조합원도 아닌 자신의 신용은 거의 등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부모님이 농사짓는 곳으로 돌아와 일손을 거들며 함께 일한 지 5년이 넘어가지만 정식으로 월급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다. 가족들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농장 카드를 돌려썼고, 심지어 휴대전화 요금도 농장 계좌에서 나가고 있다. 필요한 돈이 있으면 그 때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현금으로 타서 썼다. 그래서 농장에 필요한 뭔가를 살 때면 꼭 한 번씩은 부모님과 말다툼이 벌어졌다.

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부모님이 뒷바라지를 해주셨기 때문에 귀농한 후에도 내 경제 영역을 따로 가지겠다고 말하기가 죄송했고, 그렇게 말을 꺼내면 안될 것 같았을 것이다. 죄송스러운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고, 경제적으로 버거운 순간이 올 때마다 자괴감을 느끼며 억울해지는 감정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낸 귀농 5년은 꿈 많고 재능 많은 이 열정 청년농민을 재산도 없고, 신용거래 실적도 없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건 단순히 이 친구가 여성이라서 겪는 일은 아니다.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으로 공부하다가 독립적 사회 경험 없이 귀농해서 부모님 농장에서 일꾼으로 용돈 받으며 승계농으로 살아가는 많은 청년농민들의 이야기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빈손으로 농촌으로 들어와 우선은 일을 도우며 그렇게 일꾼처럼 살아간다. 내가 일을 한 만큼은 경제적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냐는 말을 꺼내는 것은 마치 큰 불효나 염치없는 말이 되고, 매번 그 문제로 갈등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의 시작은 “어차피 나 죽으면 이거 다 니껀데”라는 말로 끝난다. 그러다 독립을 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 상태에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그 갈등은 더욱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영농후계자로 농장경영을 배우는 일은 분명 일종의 특혜일 수 있다. 하지만 월급이나 노동의 대가로 주식이나 재산을 지원받는 것과 의식주와 보험료, 핸드폰 사용료 등의 필수 생활비를 위해 용돈을 받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물론 농촌사회에서 농업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선적인 해결과제이고, 승계농들이 자신의 신용을 쌓을 수 있도록 독립된 경영체로서 자립하고, 영농자재 구입 및 농산물 판매 실적 등을 쌓아 스스로의 신용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아무 연고도 기반도 없는 청년이 귀농을 하는 것보다, 승계농의 정착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더 많은 청년이 농촌에 들어와 살아가길 바란다면 당연히 이러한 제도와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

더불어 부모님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듯, 자녀의 진정한 독립을 위한 사회적 지위와 경험도 지원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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