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태만, RPC에 벼 파는 RPC들

수매량 절반 조곡 상태로 반출

편하게 팔려고 저렴하게 수매?

지역 간 포대갈이 우려 상존에

지역 쌀 시장경쟁력 영구 정체

  • 입력 2021.11.21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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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RPC들의 편의주의적 사업이 농협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농민들에게 피해를 안기고 있다. 지난 9월 추수를 끝낸 콤바인 2대가 적재함에 나락을 쏟아내고 있다. 한승호 기자
RPC들의 편의주의적 사업이 농협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농민들에게 피해를 안기고 있다. 지난 9월 추수를 끝낸 콤바인 2대가 적재함에 나락을 쏟아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쌀 수확과 수매가 이어지는 계절, 몇몇 지역에선 어김없이 수매가 부진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런데 고질적인 수매가 부진의 근원을 파헤치다 보면, 농협과 미곡종합처리장(RPC)의 직무태만적 행태를 목격할 수 있다.

충남 당진시농민회(회장 김희봉)는 지난해 당진시내 3개 농협RPC를 대상으로 자체조사를 실시해 관내수매량 대비 가공판매율을 계산했다. 결과는 실적이 우수한 곳이 약 70%, 저조한 곳은 40% 수준이었다. 나머지 30~60%의 쌀은 조곡 상태로 관외 반출된다는 뜻이다.

당진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공판매율이 100%인 RPC는 단지 수매량 자체가 적을 뿐, 충청 이남지역 상당수의 RPC에서 조곡 톤백을 실은 차량이 나가는 모습이 심심찮게 목도되고 있다. 판매능력이 약한 RPC가 판매능력이 우수한 RPC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두 가지 큰 문제를 양산한다. 첫째는 지역 간 ‘포대갈이’ 우려다. 통상 충청 이남지역 쌀 수매가는 40kg당 6만원대 수준인데 경기지역은 8만원을 상회한다. 수입쌀의 국산 포대갈이도 심각한 문제지만 타 지역 쌀이 경기미 등으로 포대갈이될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포대갈이는 명백한 불법행위임에도 실태를 파악하기가 난망하다. 각 RPC의 수매·판매 내역을 비교하면 간단하게 위반 여부를 파악할 수 있지만 아무리 공개를 요청한들 이걸 공개하는 RPC는 없다. 경기도가 올해부터 신고 포상제를 강화했지만 민간인은 더더욱 포착하기 어려운 부분인지라, 최근 10년 간의 신고실적이 ‘0’이다.

실태 파악이 어렵다는 건 위반의 소지가 상존한다는 뜻이다. 전남 장흥의 한 농민은 “경기에서 생산하는 쌀보다 ‘경기미’ 상품이 현저히 많다. RPC에서 드나드는 과정이 공개되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그럴(포대갈이)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의심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경기지원 관계자는 “사실상 내부고발이 있지 않고는 적발하기 힘들다. 혐의가 나온다면 RPC의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무턱대고 그럴 수는 없다”며 답답해했다.

두 번째 문제는 지역 쌀의 시장경쟁력이 정체된다는 것이다. 가령 충청에서 경기로 반출된 조곡이 ‘경기미’가 아닌 ‘국산쌀’로 표시돼 유통된다면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유통경로가 한 단계 추가됨은 물론, 매수RPC는 필연적으로 염가구매를 시도하고 거래량이 많을수록 매도RPC가 주도권을 뺏길 수밖에 없다. 매년 하향압박을 받는 이 거래가격이 매도RPC 지역 쌀값의 기준이 된다. 결국 피해는 농민들에게 돌아간다.

경기미가 타 지역 쌀보다 비싼 건 지대의 차이도 있지만 강력한 브랜드파워와 빠른 유통회전을 무기삼은 고수분율, 철저한 품종 구분관리 등 개별 RPC의 영업능력 차이가 크게 작용한다. 남부지역에선 여전히 15%대 미만의 수분율에 다품종 혼합유통이 성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기존 유통구조에 안주하려는 RPC들의 안일한 생각이 스스로의 발전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별 미질에 큰 차이가 나는 시대가 아님에도, 이런 RPC가 있는 지역의 쌀은 영원히 저가미가 될 수밖에 없다. 매년 kg당 1,000원대 중반 수매가를 받으며 2,000원 보장을 처절하게 요구하는 당진 농민들이 대표적인 피해자다.

전국 RPC의 대다수는 농협이다. 농협의 정체성으로 보자면, 조곡 매도지역 RPC는 지역 농민들을 위한 주체적 역할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이며 매수지역 RPC는 지역 내 경제사업을 뒤로하고 엉뚱한 데서 수익을 추구하고 있는 꼴이다. 농민들의 불신이 깊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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