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바삐 일하는데 그렇지 못한 통장 사정

  • 입력 2021.11.21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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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콩·팥과 같은 열매에서부터 지상부가 시든 약용작물의 뿌리까지 갈무리로 손 가는 일이 지천에 널린 수확의 계절을 보내고 있지만, 내 통장은 여전히 조용하다. 씨앗 한 알이 거두어들인 것을 보면 늘 경이롭고 고마운 마음이지만, 올해는 유독 8월 늦장마가 길었고 난데없이 10월 중순에 영하로 뚝 떨어지는 통에 예상보다 상품으로 낼 만한 것들이 적은 편이었고, 그중에 좋은 씨앗을 선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자를 새기지만, 생계를 생각하면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농사의 효율에 차라리 놉을 나가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쉼 없이 몸을 움직이는 돌봄노동자이자 여성농민인 내 노동의 대가는 남편 통장으로 버무려져 들어가기도 하고, 돈으로 환산이 안 되기도 한다. 귀농을 선택하고 가난하더라도 내가 원칙으로 삼은 농사와 삶의 의미를 중시하다가, 임차농과 출산·양육 과정을 거치며 생태적으로 지켜야 할 땅과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안정적일 필요를 느끼고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경우이지만, 때때로 스스로의 경제적 지위를 따져보면 무능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 가계의 대부분의 수입은 남편 통장으로 들어온다. 농산물과 가공품을 판매하면서 나와 남편이 각기 사업자를 내고 온라인 판매를 하다가 구분짓는 것이 번거로워 내 명의를 폐업처리하고, 남편 것으로만 쓰고 있는 형편이다. 편의상 남편 명의로 가계의 수입·지출 통장을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 가끔 남편이 통장에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말할 때면 나한테 눈치를 주는 건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왜 눈치를 보고 있지? 그러나 거꾸로 만약 내 통장이 가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하면, 나도 왠지 남편에게 눈치를 줄 수 있는 입장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듯 한 쪽에 몰아주기 하는 게 좋은 것 같지만은 않다.

경제, Economy의 어원은 집안 살림이다. 대부분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여성농민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통장이나 도장을 비롯해 크게는 땅이 없는 여성농민이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경제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가부장제 농촌 경제에 여성농민이 배제되고 있는 현실은 심각하다.

그 전에는 빌려 짓던 농사를 8년 전에야 1,000여 평의 땅을 구하여 남편과 공동명의로 시작했다. 농업경영체나 농지원부에도 같이 이름을 명시했다. 그때는 깊은 고민보다 자연스럽게 처리했던 일인데, 실제 그 당시 여성농민이 자기 명의로 땅을 소유한 정도가 약 27%밖에 안 된다는 통계 수치에 놀란 적이 있다. 갈 길이 멀었구나 싶었다.

누군가의 건강을 책임지는 농민으로서 농사를 돈벌이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경제력이 물질적·정서적 안정감의 토대가 되어 존재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경제적 문제로 농사짓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현실에서 여성농민 역시 경제적 지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부부가 같이 농사를 짓더라도 각자의 몫을 공정히 나누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한쪽 편의 일방적인 희생을 전제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가시화하는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란 작은 경제공동체를 이루어, 혼자서는 못할 일들을 배우자와 함께 해왔다. 가부장제에서 우리는 비슷한 책임을 떠안고 있는지, 부양의 의무를 어느 한 사람이 더 무겁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곤 한다. 이따금 우리는 서로 배우자가 떠나면 혼자서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나눈다. 배우자에게 의존하는 부분이 지나친 건 아닌지 다시금 나란히 자립하는 일상의 균형을 찾아간다.

농촌 경제는 위태롭고, 다수가 고단한 소농으로서 부단히도 노력하여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그 와중에 여성농민의 경제적 주체성을 세우는 길은 더욱 더딘 것 같다. 여성과 농민이라는 빈곤의 이중 굴레 속에서 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누구에게라도 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농민들에게도 나름의 ‘빵과 장미’가 필요하다고, 바쁜 손을 놀리며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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