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산다는건] 딸들도 농촌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 입력 2021.11.07 18:00
  • 수정 2021.11.09 16:23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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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언니, 바빠요?’ 친한 동생이 연락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이렇게 인사를 꺼내는 통화는 대부분 집안일이다. ‘또 부모님이랑 한바탕 했구나.’

나에게 전화를 한 동생은 몇 년 전 귀농해서 부모님과 축산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여성농민이다. 농대에서 축산을 전공하고 해외에서 유학을 하다가 집안 사정으로 귀국해서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농장을 꾸려가고 있다. 많이 배웠고, 능력도 있고, 가축들을 너무 좋아해서 농장 일에 매우 열정적인 친구다.

그런데 이 친구는 가끔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서 연락을 하곤 한다. 그 원인은 대부분 부모님의 차별 때문이다. 함께 일하다 의견 차이로 다투게 되면 부모님은 ‘너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농장은 다 남동생에게 물려줄 것이고, 너는 딱히 쓸모가 없다. 시집가면 끝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상처를 받았는데 이제는 하도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면서도 듣고 나면 자신이 너무 작아진다고 했다.

처음에 이 친구 얘기를 듣고, 나랑은 너무나 다른 상황이라 ‘요즘 세상에 참 특이한 집안이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촌에 살면서 내 주변을 둘러보니 딸들의 상황은 오히려 내가 특이한 것이었다. 올해로 서른과 마흔 언저리 즈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80년대생 딸들이 ‘며느리는 들여서 살 테지만, 사위까지 모시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을 부모님께 듣고 산다.

참 아픈 말이다. 자신이 그러하셨듯 며느리는 들여 살림을 시키고, 농장 일을 거들게 하겠다는 당연함과 사위는 반드시 모셔야 하는 존재이고 살림이나 농장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딸은 결혼을 생각하려거든 당연히 농장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명백한 신념처럼 굳어버린 이 선입견을 서투른 대화 몇 마디로 바꾸기는 어려워 보인다.

농촌의 어머니, 아버지들에겐 너무나 소중한 땅들이 있고, 그 땅들은 대부분 장남 혹은 아들들의 몫이다. 누이들은 농촌에서 농민으로의 삶을 꿈꾸는 순간부터 농장의 일원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우수함과 능력을 증명하고 무수히 헌신해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며 부모님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잘 챙기는가를 몸과 마음을 바쳐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들도 그런 생각을 할까? 물론 집안마다 상황이 다를 테지만 아들이 부모님의 농업을 이어받아 농민으로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하면, 부모님께서 도시에 사는 누나에게 혹은 여동생에게 농지를 물려 주실까봐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고민할까?

얼마 전 아저씨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된 아주머니가 이제 힘이 들어 농사를 짓기 어렵다고 하셔서, 자녀분들은 모두 도시에서 직장 다니는데 땅을 어떻게 하실지 물어보니 진즉에 제일 좋은 땅을 골라 아드님 명의로 넘겨 놓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번에 딸들에게 조금씩 나눠서 몫을 챙겨주려 한다고 하신다. 아들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지만 그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순으로 몫을 조금씩 나눠 받는 그들은 딸이다. 2021년, 이 오래되고 견고한 ‘기준’을 마주하며 나는 또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농지 승계 문제나 자산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농촌사회에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성별이 땅의 주인을 결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물려받을 땅도 없고, 애당초 우리 부모님은 물질적 자산을 유산으로 주실 생각이 없으신 분들이라 다른 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다 알기는 어렵다. 다만 부모가 내가 무엇을 남기고 전해줄까 고민할 때, 아들과 딸을 나눠 품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기준을 마주한 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증명해야 하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아들은 그저 태어난 것만으로도 물려받을 준비가 다 되어있는 것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변해서 이제는 법적으로도 상속은 아들딸 구분 없이 자식 수대로 나눠진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의 머릿속에 있는 아들과 딸의 순위는 법보다 우위에 있는 듯하다. 그런 어른들에게 한 말씀만 고하고 싶다. 부모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싶은 딸들도 농민으로 자식으로 대접받고 행복해야 농촌도 농업도 행복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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