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만 가야 할 ‘우리벼 품종다양성 강화’의 길

  • 입력 2021.10.24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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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전라북도 벼 재배농가에 닥친 ‘신동진 벼 병해충 참사’를 목도하며 일각에선 질문을 던진다. 이번 참사는 정말 예기치 못한 참사였냐는 질문, 과연 언제까지 ‘단일품종’ 중심의 벼 재배체계가 이어져야 하냐는 질문 등 모두에게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이다.

우선은 이와 같은 농업재해 피해농가에 대한 국가의 책임 강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적다. 이와 함께, 반복되는 병해충 참사의 원인 중 하나인 ‘단일품종 벼 재배’ 중심의 벼농사 체계를 극복하고, 중장기적으론 우리 벼의 품종다양성을 복원·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식민지배 거치며 늘어난 도열병 피해

사실 이번 전북 사례와 같은 대규모 병해충 참사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흔했다. 김태호 전북대학교 교수가 저서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에서 언급한 데 따르면, 근대 이전 조선 농민들의 무비(無肥, 비료 미사용) 재배에선 도열병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비성(다량의 질소비료를 견디는 성질)이 강한 일본 품종인 가메노오·리쿠우 1~3호·긴보즈·고쿠료미야코·다마니시키 등이 보급되고, 그에 발맞춰 질소비료 사용이 급증하면서 도열병 피해도 급증했다.

1926년 전라북도와 경상도, 황해도에서 도열병이 크게 발생했다. 일제가 자기네 종자를 퍼뜨리고자 한반도 곳곳에 세운 권업모범장은 1927년 이후 도열병 연구를 강화했으나, 도열병은 지금까지도 한국 벼농사의 최대 과제로 남았다는 게 김태호 교수의 설명이다.

도열병의 증가는 일제가 조선으로부터 쌀을 수탈하기 위한 ‘산미증식계획’ 추진 과정에서 벌어졌다. 김석기 토종씨드림 운영위원은 저서 <토종씨앗의 역습>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논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우량품종을 퍼뜨리는 일에 열중했다”며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자료를 인용한다. 1912년 한반도 전체 논벼의 재배면적 가운데 2.8% 정도를 차지했던 일본 ‘우량품종’은 1920년 57.7%, 1930년 70.1%, 1940년 91%로 폭증했다.

“풍흉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농가는 반드시 익음때(열매, 씨 등이 충분히 여물 때)가 다른 품종을 적당히 안배해 재배해야 한다. 조선처럼 기후의 변화가 일본에 비해 크고, 또 재배기간이 비교적 짧은 지역에서는 풍흉의 차가 심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품종만 선택해 그것만 재배하는 것은 위험률이 높다.”

이 말은 조선의 육종학자가 한 말이 아니다. 조선의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던 일본인 농학자 나가이 이사부로가 1931년 조선농학회에 발표한 「벼 조생종의 재배에 대하여」란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우량품종이 조선의 논을 장악하는 상황을 일본인 농학자마저도 경고했음에도, 상품성 있는 쌀만 중시하던 일본의 관료와 지주들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1939년 대가뭄으로 벼 수확량은 전년 대비 절반으로 떨어지는 피해가 발생했다.

한편 김태호 교수는 내비성 강한 일본 품종이 보급되면서, 비료를 적게 뿌리는 환경에 적응해 온 조선의 재래품종(토종벼)들은 설 자리를 잃어갔음을 언급했다. 해방 무렵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재래종이 실질적으로 소멸했다.

해방 후, 1970년대 박정희정권이 식량 증산을 위해 수확량에 초점을 맞춰 개량된 ‘통일계 신품종 벼(통일벼)’ 재배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때도 ‘위드(With) 도열병’은 계속됐다. 1978년 혹심한 가뭄을 거치면서 5월 하순부터 남부지방에서 도열병이 창궐했는데, 특히 통일계 신품종인 ‘노풍(전체 재배면적의 66%)’과 ‘래경(53%)’의 이삭도열병 감염피해가 심각했다.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유전적으로 획일화된 품종들이 전국 논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황에서 통일벼가 이병화(새로운 균군의 출현으로 저항성을 잃고 병에 취약한 품종이 되는 것)된 게 주된 원인이라는 게 김태호 교수의 분석이다.

벼 다양성 확보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이동현 농업회사법인 미실란 대표가 지난 19일 전남 곡성군 미실란의 벼 재배포장에서 국산 벼품종인 흑향미 벼이삭을 살피고 있다.
이동현 농업회사법인 미실란 대표가 지난 19일 전남 곡성군 미실란의 벼 재배포장에서 국산 벼품종인 흑향미 벼이삭을 살피고 있다.

물론 그때 상황은 부득이한 측면도 있었다. 국민 대다수가 보릿고개를 버티던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병해충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증산’에 박차를 가해야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병해충 피해의 원인을 ‘유전적 다양성의 취약함’ 한 가지만 갖고 분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해도, 근현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은 일제강점기 이래 과도하게 강화된 단일품종 위주 벼 재배체계(단작화된 생산체계)가 우리 농민에게 남긴 그림자는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며, 여전히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최근 전북 사례만 봐도 그렇다. 전북에서 재배되는 벼 품종의 64%가 신동진(전북농업기술원 통계)이었는데, 현장에선 신동진의 도열병 피해가 다른 품종, 특히 토종벼 품종보다 더 심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전북 전주시에서 약 60여종의 토종벼 및 신동진 등 관행품종을 함께 재배하는 강희 씨는 “신동진 벼 재배지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도열병 피해가 심각했던 반면, 다양한 토종벼들을 재배한 농지에선 도열병 피해가 거의 없었다”며 “대체로 다수확 품종 벼들의 피해가 컸다. 토종벼 재배지는 방제를 안 했는데 방제 여러 번 했던 다른 논의 벼보다 피해가 덜하고 깨끗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강씨의 토종벼에서 찾을 수 있는 도열병의 흔적은 ‘볼펜으로 찍어놓은 듯한 점 2~3개’가 다였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토종벼 확대가 가능한가 봤을 땐 ‘토종벼 지킴이’ 강씨가 봐도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유는 뭘까. 강씨는 “농민들은 여전히 농사로 먹고살기 힘들다. 특히 임차농들은 그나마 받아야 할 직불금 등의 혜택도 지주들이 가져가기에 못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생산량이라도 많이 나와야 임차료 주고, 인건비 빼고, 농자재값 빼고서도 그나마 남는 돈이 있다”고 밝혔다. 대다수의 토종벼는 다수확 품종에 비해 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기에, 농가들로선 소득 측면에서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강씨는 “토종벼는 종류도, 맛도, 기타 특성도 다양한 한편, 완전한 일반화는 금물이지만 직접 재배해 온 입장에선 자체 내병성이 강하다고 판단했다”며 “우선은 토종벼의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토종벼 확대가 중장기적 과제라면, 다양한 국산 우수 개량종의 보급은 1차적으로 시급한 사안이다. 전남 곡성군에서 농사지으며 벼 품종 연구를 병행해 온 이동현 농업회사법인 미실란 대표는 278종의 볍씨를 1,000평의 논에 심으며 각 품종별 병해충 및 현미 발아 상태, 현미의 맛과 기능 등을 연구했다. 이와 함께 다양한 고품질 국산 쌀로 만든 밥의 참맛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노력도 기울였다.

단일품종 재배 시 기후변화 상황에서 병해충의 전염이 더 쉬워지며, 병해충 저항성 확보도 어려워진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벼 품종 중에는 도열병에 강하고 또 다른 질병에 약한 품종이 있고, 그 반대인 품종도 있다. 다양한 품종의 재배로 병해충이 다른 벼에 ‘전염’되기 어려워지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나라는 집단화·규모화 농정을 추진하며 단일품종 벼 위주의 재배를 부추겨 왔다”며 “농협도 농가로부터 신동진 등 다수확 단일품종 위주로만 수매했다. 농협이 수매하지 않으니 농민들로서는 다양한 품종을 접하거나 연구할 기회도, 재배할 기회도 갖기 힘들었다. 당연히 어떤 벼 품종이 어떤 토양에 맞는지를 연구할 기회도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벼 연구 과정에서 친환경농사에 적합한 품종은 무엇인지, 가공에 적합한 품종은 무엇인지도 연구했다. 이 대표는 “고품질·다수확 쌀만이 아닌 친환경 쌀 연구를 강화하는 것도 기후위기 상황에서 벼 품종다양성 확보에 필요한 일인데, 그동안 이러한 연구를 각종 연구기관에 제안해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최근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과 합동으로 친환경 벼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한 뒤 “병해충 피해 방지를 위해선 장기간의 화학비료 사용 농사로 땅의 면역력이 떨어진 토양들에 대한 전면적인 전수조사도 필요하다. 정밀하게 토양의 상태를 조사하고, 척박해진 토질을 어떻게 회복할지에 대한 연구도 병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어렵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과도한 단일품종 재배체계 극복 △국산 벼 품종 다양화 및 보급 확대 △기후위기 상황에 맞는 대안적 벼 재배기술 개발 △친환경 벼농사 확대를 위한 연구 강화 및 토양 상태 전수조사 △토종벼 복원·보전 및 공급 확대 등의 노력을 정책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게 ‘우리벼 품종다양성 강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참고자료 : 김태호,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들녘, 2017), 김석기, <토종씨앗의 역습>(들녘,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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