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냥 우유만 건넨 결과

  • 입력 2021.10.24 18:0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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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얼마 전 중학교 교사로 지내는 지인과 오랫동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올해 초 지자체 차원에서 학교우유급식 지원사업을 확대한 덕에 이제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중소규모 중·고등학교에서도 우유를 무상급식하고 있다고 했다. 하는 일이 있어 중학생들이 우유를 잘 먹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대답은 걱정했던 대로 ‘아니오’였다.

그는 한 반 서른 명이 공부하는 교실에 우유를 급식하면 뜯지도 않은 것이 스무 개씩 돌아올 때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그렇게 남는 우유는 당일에 바로 지역사회에 기부하거나, 학교에 보관하다가 선생님들이 어쩔 수 없이 집에 가져가곤 한다고 전했다. 우유로 요거트나 치즈 만드는 법을 터득한 선생님도 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들었다. 다만, 간혹 코코아 분말 등을 함께 곁들여 제공하는 경우엔 흰 우유가 거의 남는 일이 없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공공부문의 우유급식 사업은 대개 매일 흰 우유 정량을 공급한다는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이들 식생활 복지향상을 배려한다는 측면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무엇보다도 생산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어렵고 제품의 유통도 까다로운 낙농업에 대한 배려가 크게 반영된 결과다. 급식 수요를 활용해 원유가 99% 이상 쓰이는 흰 우유의 하루 소비량을 늘리려는 취지 자체는 매우 바람직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를 원하지 않는 실수요자가 많아질수록 사업의 명분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나 역시도 학교와 군에서 우유 급식을 장기간 접했다. 영양섭취에 있어 우유가 아무리 좋다 해도 싫어하는 이들에게까지, 그것도 매일 우유 팩을 쥐여주는 건 아무래도 기분 좋지 않은 일이다. 그 경험을 버무려 생각하면 이런 일방통행식의 소비 권장은 장래의 잠재적 소비자들을 유제품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 최근 이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우유 제공을 줄이고 대신 두유나 기생산되고 있는 가공유를 내놓겠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흰 우유를 교실에 그냥 내려 두기만 하는 것, 혹은 아침 식사 대부분을 쌀밥으로 먹는 군인들에게 식후에 먹으라며 매일 우유를 건네는 등의 풍경 속에서 나는 우유 소비를 늘리기 위한 어떠한 정책적 노력도 발견하지 못했다.

유제품 시장에서 흰 우유가 중심을 잡고 있던 시대는 확실하게 지났지만, 각종 가공 유제품의 선호는 반대로 증가하고 있는 점도 활용해야 한다. 정녕 대상자들의 변한 기호를 충족시키면서도 원유 소비량을 유지하기 위한 길을 다방면으로 모색한 적이 있는가. 단순히 ‘우유를 먹지 않으니 줄이겠다’는 식의 대처는, 어려운 산업 여건 속에 날로 떨어져 가는 원유자급률이야 어쨌건 최대한 쉬운 길만 찾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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