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농사짓지 못하는 엄마농민의 하루

  • 입력 2021.10.24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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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엄마, 지금 일어나야 해요~.” 9살 첫째가 아침 7시에 나를 깨웠다. 보통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는 부모의 모습도, 해뜨기 전 밭으로 나서는 농부의 모습도 아니다. 지난 밤 농사 공부를 하다가 새벽이 되어 누웠는데, 두 살배기 셋째가 환절기 코막힘으로 잠을 못 자서 덩달아 잠을 설친 탓이다. 막내를 업고, 아침밥을 차려주고 부지런히 먹으라고 채근하며 셋째도 밥을 먹인다. 아이들이 등교하면 셋째와 놀아주다 낮잠을 재운다.

나에게 아이의 낮잠 시간은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이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밭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내에서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처리하다가 아이가 깨면 점심을 차려 먹이고 놀아준다. 막내가 어려서 농사일은 웬만하면 미뤄두었다가 몰아서 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가끔은 친구를 데리고 온다. 아이들의 간식과 저녁을 준비하여 먹이고 씻기고 재운다.

아이들이 있으니 삼시세끼 챙기는 일은 더욱 필수가 되었지만, 오히려 전보다 종종 밥을 걸렀다. 아이들의 밥을 챙겨주다 보면 입맛이 떨어지기도 하고, 아이를 업고 서서 먹는 밥이 안 넘어갔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막내를 봐주기에 바로 앉아서 먹지만 느긋하게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안 된다. 아이가 없었을 때는 밥심으로 일했다면, 이제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먹이는 에너지로 사는 것 같다.

‘어머니 대지-Mother Earth’. 모성애는 땅으로 비유되어 생명을 품고 양육하는 여성성을 위대하고 숭고한 것으로 여기지만, 한편으로는 가사와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의 희생과 헌신이 여성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역할이라는 고정관념이 되어 엄마-여성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외면하고, 모성애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소외시키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엄마는 침묵하는 땅이 아닌 욕망하는 여자 사람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너를 포기하는 일이야.’ 내 어머니도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으셨다. 실제로 엄마는 늦깎이 학생이 되어 졸업하실 정도의 열정이 있으셨지만, 전업주부 일로 인해 당신의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셨다. 엄마 됨이 자신의 삶 대신 아이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엄마 역할과 농민으로 공존하는 삶이 상당히 어렵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땅을 살리는 농민이 작물을 살리고,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곡식이 잘 자란다지만, 엄마 농민이 되니 밭에 나가는 것 자체도 부담스러워졌다. 밀린 밭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변과 조율하여 아이를 맡길 여건을 만들거나 그도 안되면 아이를 업거나 차에 두는 등 안전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해야 하니 정작 밭일이 힘든 게 아니고, 그런 과정에 대한 불편함으로 일을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전화벨이 울리고, 가스불에 올려 놓은 냄비 물이 끓어넘치고, 아이가 울고 있고, 문 밖에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과거에 유행했던 한 심리테스트를 보며 육아 전에는 ‘비현실적이네, 가스부터 꺼야지’ 했다면, 지금은 쉽게 감정 이입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아이를 달래 업고 가스를 끄고 전화를 받으며 문을 열어주겠구나’, 동시다발로 일을 쳐내는 엄마 로봇 기계처럼 능숙하게 일하고 있다. 하지만 임신 1년과 양육 2년, 총 3년만 감내하자 하여 3명을 낳았으니 최소 9년이란 시간 동안 ‘경제적인 일과 사회적인 관계’를 내 몫만큼 못했다. 훗날, 딸 아이는 커서 아이를 낳더라도 자신의 꿈을 온전히 펼칠 수 있을까.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니가 되어 다시 손주를 거두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이에게도 일하는 엄마가 교육적으로 좋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집안일은 미뤄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루에 단 3시간이라도 비록 한 칸 남은 배터리가 깜박거릴지라도 절실함으로 임하는 것이다. 주경야독, 농사짓는 워킹맘이 밤 늦도록 공부하는 까닭이다. 엄마됨을 후회하지 않도록, 대지의 여신 대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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