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노 쓰러지듯 … 중부 가을배추가 죽어간다

멀쩡한 배추가 없다 … ‘궤멸적’ 바이러스 피해 속출

계약재배 농가, 절임배추 농가 모두 대규모 피해 예상

기상이변 영향 분명한데 … 재해보상 받을 길은 요원

  • 입력 2021.10.19 17:19
  • 수정 2021.10.21 08:58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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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청주시 미원면의 배추농가 신창수씨가 바이러스병·무름병으로 완전히 망가진 밭에서 배추를 짚어 보이고 있다. 신씨는 민간계약재배와 절임배추를 병행하는 농가로, 둘 모두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청주시 미원면의 배추농가 신창수씨가 바이러스병·무름병으로 완전히 망가진 밭에서 배추를 짚어 보이고 있다. 신씨는 민간계약재배와 절임배추를 병행하는 농가로, 둘 모두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가을배추에 심각한 바이러스병과 무름병이 닥쳤다. 전국적으로 예년보다 병해가 늘어나고 있는 양상이며 특히 충북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의 피해가 극심하다. 농민들이 큰 손실을 입을 위기에 처했지만 계약을 맺었던 상인들은 등을 돌렸고 정책의 손길도 싸늘하다.

배추농가들은 매년 바이러스·무름병과 끊임없이 싸우며 농사를 이어간다. 하지만 올해의 병해 규모는 차원이 다르다. 가을배추 주요 산지인 청주시 미원면. 단지 밭의 일부 내지 절반이 망가진 수준이 아니라 밭 전체의 배추가 삽시간에 말라비틀어지는 양상이다. 한두 밭도 아니고 증상이 나타난 모든 밭이 같은 모습으로, 들녘 분위기 자체가 을씨년스럽다.

19일 기준 청주시가 공식 확인한 시내 피해 면적만 120ha며, 더 무서운 건 피해가 계속 확산 중이라는 점이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밭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 둘 증상이 발현되고 있다.
 

피해를 입은 청주시 미원면의 한 배추밭. 동청주농협 계약재배 포전 중 가장 생육상황이 우수했던 곳이지만, 추석 직후 2~3일만에 이 상태가 돼버렸다.
피해를 입은 청주시 미원면의 한 배추밭. 동청주농협 계약재배 포전 중 가장 생육상황이 우수했던 곳이지만, 추석 직후 2~3일만에 이 상태가 돼버렸다.

현장에선 원인을 기상이변으로 지목한다. 정식 이후 흙이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이어진 이례적 가을장마가 질병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는 것. 바이러스병은 보통 연작장해로 치부되지만, 예년과 전혀 다른 양상의 확산세는 기이한 날씨가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농민들로선 속수무책이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2~3일만에 밭이 전파(全破)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은 밭에 각종 약제를 투입하고 있지만 애당초 바이러스병에 유효한 약이 없는지라 병해를 확실히 막을 길도 없다.

출하는커녕 쌈배추로도 못 쓸 상태가 되자 산지수집상들은 계약파기 내지 계약금 회수를 요구하고 있다. 깨씨무늬병이나 ‘꿀통’처럼 농가 부주의로 인한 현상이 아님에도 피해는 전적으로 농가가 부담해야 할 판이다.

미원면 배추농가 신창수씨는 7,500평 농사에 산지수집상으로부터 2,000만원가량의 계약금을 받았다. 그는 “농민들은 계약금을 받아 자재를 사고 농사를 짓는데, 그걸 돌려달라 하면 빚을 내서 주는 수밖에 없다. 당장 올해 큰 피해를 입을뿐더러 내년 농사를 지을 일도 막막하다”고 호소했다.

절임배추 농가들도 문제다. 김장철에 맞추기 위해 정식을 늦게 했음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1월 작업시기가 되면 얼마나 물량이 줄어들지 알 수 없다. 어렵게 유치해둔 고정 소비자들에게 절임배추를 공급하지 못하면 당장 내년부터 이탈이 생길 수도 있다.
 

피해를 입은 밭(왼쪽)과 정상적인 밭. 정상적으로 보이는 밭에도 조금씩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피해를 입은 밭(왼쪽)과 정상적인 밭. 정상적으로 보이는 밭에도 조금씩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 내에 대규모 배추 병해 사태가 발생했지만 충북도나 기초지자체들은 지원할 수 있는 예산 자체가 편성돼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원인조사도 소극적이다. ‘바이러스병으로 추정한다’는 토양검정 결과만을 냈을 뿐 정작 비정상적인 확산 원인에 대해선 조사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다.

농촌진흥청이 조사에 나서 기후문제(자연재해)를 입증할 경우 정부의 재해지원이 이뤄지지만 이 역시 큰 기대를 걸긴 어렵다. 정황상으로는 기후문제임이 확실해도 예산 집행을 위해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해내기란 쉽지 않으며, 설사 입증이 된다 해도 지원 수준은 농약대금 정도에 그친다.

정부·지자체의 책임이 이처럼 제한적인 건 우리 농업재해 정책이 민간 재해보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재해보험도 유명무실하다. 배추 재해보험은 병충해를 보장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고랭지배추·겨울배추만이 가입대상이라 가을배추는 가입조차 불가하다. 재해급 병해를 입었음에도 가을배추 농가들은 완벽히 정책의 사각에 놓여 있다.

미원면 배추농가 최재학씨는 “60단보 중 10단보치 대금(약 1,200만원)을 깎는 조건으로 간신히 산지수집상과 계약을 유지했다. 올해 가뜩이나 인건비·비료값이 크게 올라 적자농사가 확실하다”며 “그나마 나 정도 상황이 주변에선 가장 나은 축에 든다. 농가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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