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우정의 온도

  • 입력 2021.10.17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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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며칠 전에 남편 친구의 아내가 택배를 보내왔다. 바쁠 때 남편을 빌려준 덕분에 식구들이 고향 여행을 아주 잘 할 수 있어서 무척 고마웠다고 했다. 취미로 재봉틀을 배워서 옷을 만들어서 보냈단다. 그냥 취미로 만든 옷이 아니라 오랫동안 갈고 닦은 재주처럼 정교했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유형의 옷이었다. 전화를 끊은 후에도 고마운 마음이 길게 이어져서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뱃살 가려주는 옷을 찾게 된다면 고맙고 다행이지요. 뱃살 가려주면서 최소한의 맵시 살려준다면 명품이 아닐까 싶네요. 그 명품에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면 뭐라 이름지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커다란 마음을 상상하는 수밖에요’라고.

겨울배추를 심은 직후에 남편은 친구가 먼 데서 왔다며 섬에 간다고 했다. 남편의 친구는 중국에서 수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하고 고향에 다니러 왔다고. 남편은 그 친구한테 신세를 많이 졌다. 신세 갚을 겸 해서 친구네 식구들 섬 여행 안내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탐탁지가 않았다. 친구와의 여행은 한가한 시간에 해야지 농사일이 줄줄이 이어지는 시기에 해야겠냐 싶었다. 더구나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비만 온다고 해도 어수선해지는데 대형 태풍의 방향을 주시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나라면 친구한테 미안하다며 우정은 다음으로 미뤘으리라.

남편 덕분에, 잊고 있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이었던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와 나는 가정폭력이 잦은 환경이 비슷했다. 어제는 친구네 아버지가 술 취해서 친구엄마를 때렸고 다음날은 우리 아버지가 공포영화를 연출했다. 또 그 다음날은 친구가 울면서 교실에 들어왔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거의 날마다 첫 교시에는 같이 울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친구는 서울에 있는 미용사 보조로 취직을 했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 시기에는 미용사 보조는 월급이 없고 손님이 주는 팁으로 생활했다. 친구는 손님한테 받은 팁을 모아 내게 용돈을 주곤 했다. 친구는 고향집에도 돈을 보내야 하는 처지였다.

경기도에 사는 친구는 명절에 시댁인 진도에 오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장보러 마트에 들르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때나 잠깐 만났다. 결혼한 여성들이 명절에 친구를 만나 차 마시며 정담을 나누기에는 서로가 여유롭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시부모님이 안 계신 이곳에 친구가 오지 않게 되니 자연스레 소식도 뜸해졌다. 낮에는 서로가 바쁘니 전화로 묻는 안부도 부담이고 밤에야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그마저 일상에서 멀어졌다.

농사를 짓다보면 발에 채이고 눈에 걸리는 것마다 일감이다. 밤에도 베개 밑에 일감을 깔고 자는 것 같다. 일감만 쫓아다니다 보니 놓치는 것이 많다. 그중에서 인간관계의 항상성 유지에 필요한 시간 투자가 순위에서 늘 밀려난다.

바쁜 와중에 남편은 친구와 섬 여행을 다녀왔지만 태풍 때문에 생긴 문제도 없었다. 내가 친구와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을 미뤄두면서 밭고랑을 기어 다녔어도 노후를 짱짱하게 대비해놓지 못했다.

짝꿍이었던 친구가 내년에는 미용실을 정리하고 고향에 다니러 온단다. 나도 그때는 친구한테 신세 갚을 겸 친구와 섬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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