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풍년의 역설

  • 입력 2021.10.17 18:00
  • 기자명 이희수(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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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경북 봉화)
이희수(경북 봉화)

“내 딸이 고와야 사위를 고르지.” 해마다 가을이면 한 번쯤은 듣게 되는 아버지 말씀이다. 농산물 공판장에 수확한 농작물을 출하하고, 경매를 거쳐 정산내역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어머닌 늘 가격이 박하다 하시는 편이고, 그런 어머니 앞에서 아버진 박한 가격보다는 농작물을 ‘고운 딸’처럼 키우지 못한 농부의 부족한 능력을 이렇게 탓하신다.

어머니의 볼멘소리에는 농사를 늦게 시작하여 아직 여러 모로 일이 서툰 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시장의 야박한 평가에 대한 서운함이 담겨 있다. 물론 시장의 박한 평가보다는 농부를 탓하시는 아버지의 속마음도 어머니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팔순의 부모님이 들에서 보낸 힘겨웠을 시간을 생각하면 초라한 정산내역을 내밀어야 하는 내 마음은 죄스럽기 그지없다.

올해도 고추공판장을 다녀온 뒤에 예년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내 딸이 고와야 사위를 고르지” 하시는 아버지의 대사는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작년과 비교해보니 건고추 1근(600g)을 팔아 손에 쥐는 돈이 대략 5,000원 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금년엔 나도 좀 억울한 마음도 든다. 올해는 나도 여느 해보다는 농사를 비교적 잘 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고추 농가들도 대부분 풍년이었다. 나도 ‘딸’을 잘 키웠지만, 이웃 농가들 또한 내가 키운 것 이상으로 ‘딸’을 잘 키운 것이다.

게다가 올해는 고추 재배면적도 적지 않게 늘어났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0년대 들어와서 고추 재배면적은 계속해서 줄어드는 추세였다. 8만ha에 이르렀던 재배면적은 2003년 5만7,502ha, 2011년 4만2,574ha, 2017년 2만8,337ha까지 떨어졌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고추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재배면적이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다. 올해 고추 재배면적은 3만3,373ha로 지난해 3만1,146ha보다 2,227ha(7.1%)나 증가하였다. 이렇듯 재배면적이 늘어나고 작황 또한 좋았으니 가격의 하락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농부들에겐 흉년만큼이나 풍년도 무섭다. 농부가 가뭄과 폭우, 이상저온과 이상고온 등 예측하기 어려운 가혹한 날씨와 각종 병충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되더라도, 훌륭한 농부도 어쩌지 못하는 최종 관문이 아직 남아 있다. 바로 시장의 평가이다. 농산물 한 알 한 알에 담긴 농부의 간절한 소망도, 병원비나 입학금을 마련해야 하는 일가족의 절박한 사연도 모두 지워지고 오직 상품의 크기와 무게, 빛깔과 향기와 맛으로만 평가받는 시장은 농부에겐 참으로 비정한 곳이다. 아무리 우수한 농산물일지라도 풍년이 되어 농산물이 넘쳐나서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면 한여름의 털옷 신세를 면치 못한다. 농부가 흉년이나 풍년에 대한 걱정없이 오직 농사에만 전념할 수는 없을까?

해법은 도처에 있을 것이다.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 등 각종 선거 때마다 들어온 탓에 ‘농산물 가격안정기금’이나 ‘농산물 최저가격보장제’, ‘농민기본소득’ 등은 농민들에도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WTO나 FTA, 농업예산의 축소 등, 농업을 둘러싼 대내외적인 여건이 점점 열악해지는 상황에서 벼랑으로 내몰리는 농민들에겐 참으로 솔깃한 정책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멀리 있는 물이 가까이 있는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부분의 농업문제의 해법도 결국은 정책 결정권자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후보 시절 농업은 직접 챙기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국가 전체 예산 중 농식품부 예산 비중은 2018년 3.4%에서 2019년 3.1%, 2020년 3.1%, 2021년 2.9%, 2022년 2.8%로 줄곧 축소되어왔다. 늘 그랬듯이 농민들에겐 갈증은 가까이 있었고 물은 멀리 있었지만, 그들에겐 갈증은 멀리 있었고 물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10월의 이상고온과 잦은 비로 들에는 배추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한다. 기후위기가 불러올 재앙의 예고편을 보는 듯하여 불길하기 그지없다. 농업을 둘러싼 우울한 징표들은 이렇듯 도처에 있지만, 농민의 갈증을 모르는 이들에게 물의 사용권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우울한 징표는 없을 것이다.

물의 사용권이 없는 우린 내년에도 풍년을 걱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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