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여성농업인 바우처, 사용설명서가 필요해요

  • 입력 2021.10.10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강원도의 겨울은 한적하다. 겨울이 한적하다는 얘기는 나 같은 소농은 겨울 동안의 생활비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 와중에 옆 동네 마을기업에서 전통짚풀공예를 하는 장인께서 겨울 동안 짚풀공예품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서 공예품을 만들면 최저임금 정도의 보수를 준다고 제안을 해주셨다. 청년창업농지원 받는 것에도 문제가 없는 두 달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덕에 경제적으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여성농업인 바우처(강원도는 여성농업인 복지바우처) 카드를 신청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 잠깐 일하면서 들었던 4대보험 때문에 여성농업인 바우처 지원대상에서 탈락되었다는 것이었다.

농업으로 생계유지가 녹록지 않다보니 봄가을로는 인근 골프장으로,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여름이면 강가 유원지 등으로 한두어 달씩 일을 다니는 여성농민들이 무척 많다. 사정이 그러한데 생계를 위해 잠시라도 농업과 일을 병행하면 여성농민으로서 누려야 할 문화·복지 혜택을 누릴 수 없다니 참 애석한 일이다.

통칭 여성농업인 바우처는 문화·여가활동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읍·면지역 여성농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활동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문화·여가시설에서만 쓸 수 있고 매년 신청기간에 맞춰 신청한 뒤 기간에 맞춰 가서 카드를 발급받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 의도가 너무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여성농민의 처지를 생각하고 만든 제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선 직장에서 월 60시간을 일하거나 4대 보험에 가입한 여성 농업인을 제외한다는 규정은 현실을 너무 외면한 처사이다. 별 수입이 없는 농한기에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제외한다니…. 대부분 예산 부족으로 인해 제한사항을 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나마도 예산이 부족하면 나이순으로 잘라 상대적으로 어린 사람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단다. 여성농민의 수가 그 정도로 많지는 않을텐데 왜 그렇게 인색한지….

게다가 이 제도를 오래전부터 시작해서 정착된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에서 바우처 카드의 본래 의도를 알고 쓰는 분들이 몇이나 될까 싶다. 문화·관광·여가를 위해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나 대형리조트나 콘도 등 관광지 및 자체 상품권을 발행하는 곳에서는 사용이 불가하고, 복지를 생각하고 약국이나 병원에서 쓸라치면 결제가 되지 않는 곳이 수두룩하다.

시간 날 때마다 가는 곳 중 가장 유용한 곳이 마을 미용실인데 만원, 만오천원에 뽀글뽀글 파마를 즐기시는 할머니들이 잊지 않고 바우처 카드를 사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사용하다가 잔금이라도 확인하려면 카드에 깨알만하게 적힌 대표번호로 전화해서 몇 번, 몇 번을 누르고 카드번호 몇 자리를 다 누르고 나야 잔금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잔금이 얼마인지 몰라 계산하려다가 결제가 안되면 그것도 민망할 노릇이다.

워낙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적어서 카드를 냈다가 거절당하면 무안해서 못쓰고 묵혀서 회수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한번 써봐서 된 곳에서만 계속 쓰는 분들도 있다.

이제 한두 해 몸으로 부딪혀 바우처 사용처를 알고 계신 어르신들은 카드를 발급받는 대로 삼삼오오 팀을 모아 읍내로 가신다. 한 팀은 화장품가게로 가서 1년치 아들·딸·며느리 화장품을 구입하시고, 다른 한 팀은 등산복 매장으로 가 아들·남편 운동화나 점퍼를 구입하신다.

읍내에 나올 차가 없으니 팀을 짜서 차량이 지원되는 날 한 번에 다 써버려야 한다는 게 너무 속상하다. 쓸 수 있는데 선택해서 한 번에 사용하는 것과 쓸 줄 몰라서 그냥 써버리는 건 엄연히 다른 것이다. 여성농민으로 살아가는 노고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 걸까? 왜 이런 제도를 만들었는지 알려주고, 왜 바우처 사용처를 제한하는지 좀 더 친절하게 알려준다면 내 주변의 많은 여성농민들이 지금처럼 저 돈을 쓰게 될까 싶다. 이건 날 위한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좀 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사용하지 않을까?

여성농민들이 문화와 복지의 혜택을 누림으로써 심신의 안정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이 훌륭한 지원사업이 실제 당사자들에게 그 목적과 결과로 인한 변화까지 인지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친절히 안내해 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다. 뭐든 새로운 것에는 사용설명서가 필요한 법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