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일을 하다 오후 네다섯시 정도 되면 매일 반복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오늘 저녁은 애들한테 무슨 반찬을 해서 밥을 차려줘야 되나. 일이 많고 적고, 급하게 해치워야 될 일이 있고 없고 간에 가닥을 잡아놔야 된다.
김치는 아직 여유가 있는데 밑반찬이 뭐가 있더라. 그제 끓인 미역국은 다 먹었으니 오늘은 된장국을 끓이면 되겠다. 고등어 한 토막 굽고 콩나물을 무칠까. 그래 된장국 대신 콩나물국을 조금 끓이고 나머지로 나물 무치면 되겠다. 아니, 힘들어 죽겠는데 돼지 목살 한 근 사다 구워줄까. 고기가 채소보다 일이 훨씬 적고 편한데.
아내의 회사 특성상 새벽 출근에 한밤중 퇴근이라 평일 저녁 준비는 내 몫이다. 지금이야 애들만 챙기면 되지만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살 때는 머리가 더 복잡했다. 노인네들 입맛과 애들 입맛이 차이가 나니 모두에게 만족스런 밥상을 차려 내기가 쉽지 않았다. 십수년 자취 생활 경험을 밑천삼아 몇 가지 반찬과 국으로 돌려막기만 하는 부엌 살림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흙투성이로 집에 들어가 손만 대충 씻고 옷 갈아입고 저녁을 준비하는 게 계속되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 우리 엄니다. 아~ 내 어릴적 울엄니도 이랬겠구나. 종일 땡볕에서 밭을 매다가 해가 기울면 호미를 내던지고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 먹을 저녁을 준비하실 때마다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그냥 남이 차려준 밥 먹고 자리에 눕고 싶은 걸 꾹꾹 참고 밥 하고 된장이라도 끓이고 나물 하나라도 무치고 생선토막이라도 굽고…. 엄니도 밭에서부터 저녁 걱정을 하셨을 것인디….
농담 같은 생각이지만 자주 여성농민회에 가입하고 싶어지더라. 밭에서 일하고 해가 지면 일이 끝나는 게 아니고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여성농민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내가 직접 경험을 하고서야 깨닫게 되었던 모양이다.
여성농민들이 농사일 외에 추가로 해왔던 일이 밥 준비만이겠는가. 난 빨래까지는 도저히 못 챙긴다. 회사가 쉬는 주말에 집사람이 할 일로 아예 미뤄버렸다. 집안 전체 살림도 아내 몫으로 넘긴 채 살고 있다. 겨우 저녁 준비하는 걸로 생색을 낼 수가 없다. 그냥 면피용이다.
이 대목에서 또 엄니 생각. 아이고 엄니는 그 일들을 어찌 해내셨을까. 때 되면 장 담그고 수시로 김치 담고. 세탁기 없던 시절에 그 많은 빨래는 또 어찌 해냈을까. 아직도 이 땅의 여성농민들은 그 일들을 어찌 해내고 있을까. 집안 살림의 근본은 여성이라는 생각이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수록, 일부라도 직접 그 일들을 할수록 굳어지는 느낌.
농장일도 비슷한 맥락이 많다. 농사일은 나 혼자 하다 보니 항상 뭔가 허술하다. 내가 잘하는 일은 따로 있다. 기계일, 밭 만들기, 거름내기 등등은 힘이 들어서 그렇지 맘만 먹으면 뚝딱 해치울 수 있으나 작물 관리나 수확물 갈무리, 포장 같은 일들은 고역이다. 농장은 항상 정리가 되지 않고 농막은 순식간에 발디딜 틈이 없이 난장판이 되기 일쑤다. 항상 이가 크게 빠진 느낌이다.
세상이란 게 눈에 보이는 것만 보기 쉽고 과정보다는 결과물만 보기 쉬운 모양이다. 남성은 돋보이고 여성은 그들의 역할에 비해 잘 보이지 않고 있다는 느낌적 느낌은 거기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 속에 들어 있는 속사정을 직접 경험하고야 깨닫게 되다니. 경험하지 않고도 과정과 역할들을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해줄 수는 없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여성들의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출발점은 가정일 것이다. 특히나 농가에서 더 그러지 않겠는가. 모든 걸 같이 의논하고, 같이 수다 떨고, 결과물도 같이 나누고.
김치가 떨어져 가니 배추, 무 조금 솎아서 김치를 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