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⑥] 청결고추의 원조시장, 괴산 오일장

  • 입력 2021.09.19 18:00
  • 기자명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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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어머니는 해마다 추석이 코앞일 때 물고추를 사러 다니셨다. 두물과 세물 고추를 사야 한다는 의지가 대단하셔서 적어도 도시와 산골 오지를 찾아다니실 만큼의 힘이 있는 동안에는 늘 그러셨다. 시장에도 가고 여기저기 많이 다니셨지만 나중에는 괴산의 한 농가를 주로 다니셨다. 결혼을 하고 나도 고추가 필요했으므로 몇 해 동안은 어머니를 따라다녔고 또 몇 해인가는 어머니를 모시고도 다녔다. 

물고추는 사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번 씻어 꼭지를 떼고 길이로 반을 갈라 말려야 했다. 비를 맞아서도 안 되고 날이 궂어 곰팡이가 나도 안 되는 일을 참으로 미련하게도 반복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건고추를 사다 꼭지를 떼고 마른 행주질을 해서 고추방아를 빻아다 쓰셨지만 이제 어머니는 더는 물고추든 건고추든 사러 다니지 못하신다. 다만 추석이 가까워지면 김장할 고추를 사야 한다고 자꾸 말씀을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추석 전에 1년을 두고 먹을 고추를 구입해야만 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올해 나는 오래전 어머니와 사러 다녔던 그 물고추를 사러 가고 싶었다. 그래서 8월 중순 무렵 영양의 오일장엘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내가 찾던 물고추를 만날 수는 없었다. 코로나19 때문에도 장터가 썰렁했지만 영양만의 특징을 만날 수 없는 곳이라 더욱 한산한 모습이었다. 인근에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추유통센터를 통해 자동차에 올라타고 도시의 소비자와 만나는 고추들만을 만났을 뿐이었다. 지자체의 그런 선택은 지역의 시장 활성화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모습으로 자꾸 위축되고 있었다. 

다시 8월의 세 번째 토요일은 마침 무주의 장날이라 엄청 큰 규모의 고추시장이 선다고 꼭 오라시던 어르신의 말씀이 기억났다. 졸음을 쫓으며 새벽부터 찾아갔지만 운이 나쁘게도 장대비가 퍼부어서 그날의 내 일기에는 또 공친 날로 기록됐다. 

 

이맘때쯤 괴산오일장에서는 시장 어디서나 산더미처럼 쌓인 고추를 볼 수 있다. 고추를 파는 한 상인이 장을 보러 나온 이들과 대화하고 있다.
이맘때쯤 괴산오일장에서는 시장 어디서나 산더미처럼 쌓인 고추를 볼 수 있다. 고추를 파는 한 상인이 장을 보러 나온 이들과 대화하고 있다.

 

내가 그러고 돌아다니는 사이 괴산에서는 물고추 시장이 섰다가 파하고, 건고추 시장이 섰다가 또 파했다. 처음부터 괴산을 향했어야 했는데 정보가 너무 없기도 했었고 일정이 안 맞기도 했었다. 그러다 고추로 유명한 곳이니 장날에도 고추는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괴산 오일장엘 갔다. 대대적인 고추시장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으나 괴산의 오일장으로 가는 길엔 이곳이 고추로 유명한 괴산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트럭이나 경운기에 고추를 싣고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았고 장터에는 정말 많은 고추들이 나와 있었다. 호박을 팔러 나오신 할머니도 고추봉지를 앞에 놓고 계시고, 속옷을 파는 가게 앞에도 고추봉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괴산고추의 큰 특징은 세척 후 깨끗하게 잘 말려서 꼭지를 모두 따고 청결고추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추를 구입한 사람들이 집으로 가져가 따로 손질하는 수고 없이 근처 방앗간에서 바로 빻아서 들고 갈 수 있도록 했다. 오일장 근처엔 오래된 방앗간이 적어도 5개는 있어서 누구라도 쉽게 고추방아를 빻아갈 수 있다. 

 

괴산에는 세척 후 깨끗하게 말려 꼭지를 모두 딴 ‘괴산청결고추’가 있다.
괴산에는 세척 후 깨끗하게 말려 꼭지를 모두 딴 ‘괴산청결고추’가 있다.

 

특이하게도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산막이시장과 전통시장이 모두 오일장이 되는 괴산의 오일장에 고추만 있는 것은 아니다. TV 출연 이후로 줄을 서지 않으면 사먹을 수 없는 가마솥에 튀겨 파는 닭튀김이 있고, 멀리 여주에서 오시는 부부가 팔고 있는 오뎅과 오징어튀김이 있고, 시원한 막걸리와 함께 파는 모듬전도 있다. 무엇보다 이제 막 채취하기 시작한 각종 야생 버섯들은 물론이고 햇쪽파, 알타리무와 초롱무, 배추들도 얼마든지 많다. 

말린 고추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적지만 물고추도 있고 꽈리고추도 있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고춧잎도 만날 수 있다. 고춧잎 속엔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 고추들이 하얀 꽃들과 함께 꽤나 많이 들어있다. 물고추도 사고, 고춧잎도 사고, 열무도 한 단 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주머니 속엔 동전만 약간 남았다. 

돌아와 장바구니에 담긴 것으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 마치 고추를 주제로 밥상을 차린 것 같은 한상이 차려졌다. 밥상을 앞으로 당겨 급하게 숟가락을 놀린다. 맛있는 괴산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시장을 방문한 군민들이 노점에서 요기를 하고 있다.
시장을 방문한 군민들이 노점에서 요기를 하고 있다.

 

괴산오일장 전경.
괴산오일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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