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여성만의 돌봄노동 대물림은 사양합니다

  • 입력 2021.09.19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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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엄마는 왜 주말에도 일해!?”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까지 내처 일하려 하니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 입장에서는 토요일을 양보하여 일하는 엄마 옆에서 기다려 주었으니 일요일은 같이 놀아주겠지 했는데, 엄마는 간만에 비가 멈추었으니 밭 정리할 일이 시급하여 자기 마음을 몰라주니 따져 묻는 것이었다. ‘농사짓는데 주말이 어딨냐’ 타이르고 싶지만, 이렇게 엄마와 같이 놀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도 한 때 아닌가 하여 일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그래도 콩대가 길어 나자빠진 물레콩과 연일 습하여 곰팡이의 밥이 되어 버린 붉은어금니동부콩, 순을 관리하지 못해서 온 밭을 장악해버린 청호박 넝쿨이 아른거린다. 차일피일 뒷전이 되어버린 밭의 꼴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영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그래도 당장 원성이 자자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내 시간을 차지한다.

농사와 육아는 생명을 다루는 다차원적인 일이라 섬세한 촉을 발달시키지만, 어떤 면에서 육아가 농사보다 훨씬 까다롭게 느껴진다. 9살 아들, 7살과 갓 돌이 지난 딸들이 자라는 시기에 따라 각기 필요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나이와 수준에 맞는 적절한 활동과 환경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

유자녀 여성농민의 시간은 절기를 따르는 농민의 삶이 못되었다. 큰며느리가 되어 시가에서 삼대가 함께 살아보니 더욱 촘촘하게 육아와 가사 일에 얽매였다. 등교를 챙기다 보면 해가 뜨거운 때에 밭으로 나서야 하고, 하교 후에 식사와 아이들을 챙기다 보면 해가 진 저녁도 분주했다. 농한기에 아이들은 방학을 맞이하니, 오히려 개학하는 농번기를 기다릴 정도였다.

오래된 가부장제 관습의 굴레는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이어서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이제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여자만의 몫이라는 통념은 무너졌지만, 실제로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았다. 여성들끼리 대를 이어 나누어야 하는 가사와 양육 부담의 한계는 여러 갈등을 일으켰고, 여성의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제약해 왔다.

내가 농사일이나 바깥 활동으로 집안일을 소홀하게 하면 내 역할을 대신하여 그만큼 시어머님이 더 고생하게 되는 구조라 죄책감이 절로 들었다. 여러모로 의지처가 되어 주신 시모가 계셔서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불편함도 자리했다. 집 안에 양육과 돌봄을 담당하는 순위가 있다면 1순위가 며느리와 시어머니였다. 남편도 부모와 아내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나는 많은 부분을 어머님과 함께 하고 있었다.

시모는 당신의 힘드셨던 시가살이를 며느리에게 반복하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님 덕으로 나는 7년의 시가살이를 살아낸 것 같다. ‘어머님처럼은 못 살 거에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지게질을 하셨고, 칡 같은 약재를 작두로 잘 써리시고, 몇 십인분 요리도 뚝딱 해치우셨던 잔뼈 굵으신 살림꾼이셨다. 그 대가로 마른기침과 어깨·허리에 묵직한 만성 통증을 짊어지고 계셨지만…. 사실 나 역시 그 당시에는 시가살이에 어렵사리 적응 중이라 죄송하게도 시어머니의 희생과 배려에 대해 깊이 생각을 못하였다.

월든 호숫가에 소로우의 밥과 빨래는 그의 어머니가 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립을 실천하던 소로우는 자신의 집안 살림을 왜 엄마에게 미루었을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엄마가 성인이 된 자식의 밥과 빨래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시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내 자식만은 농사짓지 말기를 바라며 별 도리없이 한 몸 바쳐 농사를 지어 오셨던 부모님들과,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하며 윗세대와 고리를 끊어내고 싶어 하던 딸들의 마음을 가까이 보아왔다. 다른 듯 비슷한 것이 있다면 대물림에 대한 두려움과 농사와 가사를 경시하는 사회적 풍토일 것이다. 이제는 한 농부와 엄마의 삶으로서 자식들에게 대물림될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가사와 양육의 부담을 가족 구성원들과 쪼개어 고루 나누고, 풋동부를 따서 밥을 지어 콩을 싫어하던 아이도 맛있게 먹는 마법을 부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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