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지긋지긋한 ‘마법의 주문’

  • 입력 2021.09.19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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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정부는 종종 해리포터마냥 ‘마법의 주문’을 써왔다. ‘반공방첩’, ‘수출 100만불’, ‘선진조국 건설’ 등등….

그중에서도 떠오르는 몇 가지 구호가 있으니, 첫 번째가 ‘86·88’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극을 벌이고 집권한 전두환은,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메꾸려는 의도로 1986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나섰다. 둘 다 유치에 성공했다. 정권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성공개최를 위해 온 나라가 합심하자고 했다. ‘86·88’은 전두환정권에 불만을 가졌던 적지 않은 시민들도 공감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86·88’이란 미명 아래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 빈민들이었다.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에 나오듯이, 전두환정권은 ‘성화가 1분 가량 지나가는’ 거리에서 ‘미관상 안 좋은 집’들이 있다는 이유로 그 집들을 때려부쉈다. 그들은 올림픽 성화 때문에 집을 잃었다.

1995년,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라는 새로운 마법의 주문을 되뇌었다. ‘세계 추세’에 맞게 문이란 문은 다 열어젖혔다. 안 그래도 1980년대 우루과이라운드에 시달렸던 농민들이었건만, 더더욱 무시무시한 수입개방의 파고에 부딪혔다. ‘세계화’ 선언 다음해에 대한민국은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이 땅의 농민들은 수입농산물 때문에 살 길이 막막해졌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됐다.

2021년 현재, 문재인정부는 이제 ‘탄소중립’이라는 새로운 마법의 주문을 되뇌이고 있다. 어찌보면 이 주문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치성향을 막론하고 모두가 공감할 구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웬걸. 새로운 마법의 주문마저도 농민을 소외시키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탄소중립’이란 미명하에 농지를 파헤쳐 태양광을 만들려 하고, 농촌 온 사방에 송전탑을 만들어 도시에 더 많은 전기를 몰아넣으려 한다. 정작 그 태양광은 농민의 삶의 터전을 모조리 빼앗아갈 판이며, 송전탑의 전기는 농촌으로 가지 않는다.

그런 폭력을 저지르면서 기후위기 극복과 탄소중립을 위한 논의의 장에 농민·노동자의 자리라도 마련했을까? 아니다. 탄소중립 명분으로 온갖 미사여구를 뿜어내는 공간엔 대기업 총수, 고위직 공무원, 일부 친정부 전문가들의 자리만 마련됐다. 농민·노동자·빈민·여성·성소수자의 자리는 없다. ‘86·88’과 ‘세계화’처럼, ‘탄소중립’이란 마법의 주문은 민중의 삶과는 상관없는 주문이다.

진정한 탄소중립 실현, 나아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전제조건은 ‘정의로운 전환’이다. 농민을 비롯한 민중이 주체로서 대안 모색에 함께할 수 없는 한, 탄소중립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저 또 하나의 헛된 ‘마법의 주문’으로 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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