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발칙한 상상

  • 입력 2021.09.05 21:32
  • 기자명 김승애(전남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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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애(전남 담양)
김승애(전남 담양)

올봄, 농자재 지원 사업으로 친환경액체비료를 두 상자 받았다. 1년을 두고두고 쓸 양이다. 그런데 두 달이 채 안 돼 결과보고서를 제출하라면서 처음 제품사진과 다 쓴 제품사진(뚜껑과 빈병을 찍은)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두 달 만에 밭에다 다 퍼부으라는 것인가!

또 한 번은 어떤 사업을 신청하는데 유기인증서와 함께 경작사실확인서를 내라는 것이다. 물론 낼 수 있었지만 인증기관에서 매년 몇 번씩 나와서 사진도 찍고 영농일지대로 경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인증서를 발부하는데 굳이 경작사실확인서가 필요했을까?

어떤 분의 사례는 미약정 물품이나 채소 수확이 막 시작되는 시기라 자신이 속해있는 생협에 납품하려고 문의했더니 다음달 회의에서 결정할 테니 기다리라고 했단다. 결국 갈아엎었다고 한다. 작물이 회의 시간까지 기다려주지 못하니까 말이다.

또 한 분은 학교에 급식으로 납품을 하는데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고 반품을 받으셨다고 한다. 별다른 품위에 손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과연 농산물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람도 다 제각각의 모습을 지니고 다양하게 살아가는데 생명이 있는 농작물에게 너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문득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농업·농촌과 관계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농업·농촌을 자세히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래보아야 그 안에 있는 농민이 사랑스러울 텐데 말이다.

그러면서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농업정책과에 근무하고자 하는 공무원들은 최소 1년 정도의 농업연수 과정을 필수화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거쳐보고 땅을 만들 때부터 씨를 뿌리고 수확해 판매하는 것까지 모두 경험해 본 뒤 담당 직책을 수행하는 제도가 마련되는 것이다. 마땅히 그런 공무원에게는 많은 인센티브도 주고 말이다.

학교에서 영양사나 식문화교육을 담당하는 분도 최소한 1년에 얼마큼씩은 농업연수를 다녀오게 하는 것이다. 하루 맛보기로 눈으로 구경하는 연수 말고 파종기나 수확기에 일주일 정도 농촌에 머무르며 농민들에게 지혜도 얻고 말이다.

생협 실무자나 이사 등의 임원진이나 공판장의 경매사, 농협 직원들도 주기적으로 연수를 다녀와야만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다.

농산물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작물에는 농사를 짓는 내내 농민의 희로애락이 담아지고 생명의 소중함이 담겨진다. 농업이 편의주의적 탁상행정과 서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존엄성과 평등을 가르치는 교육에서 농산물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도 일관성이 없는 교육이다. 건강하고 맛있는 농산물을 잘 팔아주면 좋을 텐데, 생산자와 소비자의 중간에 있는 분들이 농업을 사랑한다면 최소한 소비자의 편이 아니라 중간입장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도 농사 현장에 몇 번 와서 악수하고 농업을 이해한 듯 끄덕이지만 과연 그럴까? 최소한 대통령이나 광역시·도지사, 군수 등의 선출직 정치인들도 의무적으로 농업연수를 하고 수료증을 받은 이력이 있어야만 출마 자격을 줄 수 있다면 농업정책이 바뀔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온다면 농민의 존재가 새롭게 자리매김되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 봤다. 농업·농촌을 자세히 오래보면 농민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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