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婦’가 아니면 못 들어가는 농촌 여자들의 모임

  • 입력 2021.09.05 21:3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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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우리 마을은 매년 복날이 되면 온 마을사람들이 모여 간단한 행사를 진행하고 함께 삼계탕을 먹으며 더위도 이기고 서로의 안부도 물으며 지내왔다. 행사는 대부분 마을회관에서 진행이 되고, 함께 나눌 음식의 준비는 어느 곳이나 그렇겠지만 당연히 부녀회의 몫이다. 올해는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모여서 함께 먹을 수 없으니 포장 용기를 구입해서 한 그릇씩 포장하여 집집마다 배달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논의하게 됐다.

어차피 모이지는 못하는 상황이니 음식 준비를 동네 식당에 맡기고 배달만 역할을 나누자는 의견에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노인회장님과 몇몇 분이 한마디를 던지셨다. ‘그냥 솥에 닭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걸, 그게 무슨 별일이나 된다고 남한테 맡기느냐’며 그냥 하던 대로 부녀회에서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삼복더위라서 복날인데, 그 더위에 주방에서 마을 인원수의 삼계탕을 끓여내는 것이 별일이 아니라는 말씀에 동의하기 어려워서였다.

마을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부녀회의 가장 큰 역할은 마을 행사 때 주방 안에서든 천막 아래서든 음식을 끓이고 부치고 만들어서 차리는 일일 것이다. 농촌의 행사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리 행사가 좋았어도 음식이 맛이 없거나 부족하면 두고두고 좋지 못한 소리를 듣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부녀회의 음식 장만은 나름의 권력이 되기도 하고, 무보수 노동에 동원됨에도 그저 마땅한 책임이기도 하다. 물론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 마을 일에 누구 하나 노는 손은 없겠지만 매번 남들이 먹고 마시며 즐길 때에 더위 속에 또는 추위 속에 다리, 허리가 후들리며 해온 그 일은 ‘별일’이 아닌 게 아니지 않나 싶다.

게다가 농사만으로는 불안정한 소득 때문에 식당으로, 학교 조리사로, 리조트 청소부로, 골프장 잔디 때우는 인력으로, 요양보호사로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부녀자’들은 낮 시간에 마을에 나와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번에 삼계탕을 식당에 맡기자는 의견의 배경에는 이러한 현실의 변화도 반영됐을 것이다.

그리고 부녀회가 하는 일은 음식 장만 말고도 많다. 소위 요즘 사회에서 말하는 ‘돌봄’의 영역을 농촌에서는 ‘부녀자’들이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다. 아픈 어르신들을 살피고, 마을의 취약계층이나 혼자 사는 이들과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고, 나눔을 자원하기도 한다. 철마다 공동으로 필요한 식료품이나 생필품들을 구매하여 분배하기도 하고 병원을 모시고 다니거나 약을 사다 드리기도 한다.

요즘 도시에서는 돌봄을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과 관련된 처우를 개선하고 제대로 된 인식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농촌사회에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던 먹거리 장만을 비롯한 다양한 돌봄이 제대로 인정받고, 체계화되면 좋겠다. 그 책임과 일들을 함께 고민하고 나눠 가질 수 있다면 농촌사회가 가부장적이라는 평가도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부녀회’의 역할과 위상이 시대 흐름에 맞게 바뀌었으면 한다. 특히 명칭이나 회칙도 좀 바꿔서 부녀자가 아닌 마을여성들의 모임이 된다면 나와 같은 미혼여성들도 함께 손을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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