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고립을 넘어서는 힘

  • 입력 2021.08.22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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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청년에서 장년으로, 이제 마흔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농촌에서는 꽤 젊은 나이에 속하지만, 사실 불혹이라는 길 앞에 선 것이다. 매년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나이 드는 맛이라면, 여성농민으로 뿌리내리는 삶에서는 왠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계가 좁아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활동하라’는 구호를 가슴에 새겨보지만, 농사라는 작업 특성상 매일 익숙한 환경, 일정한 루틴, 평생을 한 마을 안에서 몇몇 아는 얼굴들 사이에만 있다 보니 작은 지역 사회 안으로 생각이 수렴되는 것 같다.

성숙함이란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품을 수 있는 생명과 그것을 대하는 정성, 세상을 이해하는 깊이에서 드러난다. 언젠가 성숙한 여성농민이 되어 내 아이들을 비롯하여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랐는데,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으로는 어림도 없겠다.

고령화된 농촌에는 또래 사람을 만날 기회도 거의 없거니와 마을에서 여성농민은 자신의 이름과 존재로서가 아닌 누구의 딸,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 엄마라는 결혼과 가족 제도 틀 안에서 여성 서사를 이어가는 한계가 깊이 남아있어 더욱 고립감을 느낀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심으로 형성되는 배타적인 농촌의 가부장제 문화도 귀농자에게 때로 낯선 미로 속을 헤매게 한다.

어떠한 일도 10년을 하면 잔뼈가 굵은 사람이 된다지만, 이제 겨우 십 수번 농사를 지어보았을 뿐이며, 무수한 품종 중에서 몇 가지만 길러보았으니 농부라는 업과 삶의 호흡은 길고 느리게 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농민으로서 우리네 일상이란 적당한 노동과 여가의 균형 없이 무언가에 내쫓기듯 숨 가쁘게 달리고 있기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볼 시간도 없을 뿐더러 타인과 관계맺을 여유가 없다는 점도 이중 삼중의 단단한 벽이 된다. 전통적으로 집 안팎으로 여성농민에게 과중한 노동이 부과되어도 묵묵히 수행해 왔지만, 여성농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입지가 확보되거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여성농민 건강실태 조사를 보면 확실히 슈퍼우먼도 아니지만, 사회가 여성농민을 돌봄과 농사 ‘만렙’으로서 그 역량을 높이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성역할을 고정하고 돌봄 노동의 가치를 경시하기 때문에 여성의 빈곤과 소외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생애주기별로 돌봄의 대상을 주로 책임지는 여성농민의 역할을 주변에서 보면 1년만, 2년만~하며 개개인이 애면글면 감내하고 살지만, 길게 보자면 할머니 때부터 지금까지 그 일은 끝없이 대물림되어 농촌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돌봄 노동도 재생산의 영역에서 농촌 사회에 얼마나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역할인지 그 가치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

농민이라서 농사와 가사는 기본으로 도맡아하며 농외 소득활동까지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 하였으나, 여성이기에 생산의 주체가 아닌 보조자로 법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해왔다. 이제는 여성농민회의 오랜 요구 끝에 농식품부에 농촌여성정책팀이 신설되었고 개별 농민등록제와 농민기본소득 정책 등이 검토되고 있다.

여성농민은 일상에서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개개인의 존엄성 회복과 자아 확장의 길을 찾아간다. 시간과 공간의 확보, 여유, 자기계발, 대외활동 등으로 틈을 만든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면 다양성의 존중일 것이다. 여성농민이라는 범주 안에도 비혼, 이주여성, 장애, 퀴어, 비건 등 고유한 주체의 특성과 취향에 따른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다. 농촌의 열린 네트워크를 통해 이러한 다채로운 여성농민의 철학적 사유가 꿈틀거리고, 땅에 뿌리박힌 목소리와 지혜가 피어나 널리 공유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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