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다행 중 불행 하나

  • 입력 2021.08.15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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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농사를 짓다 보면 경제작물 외 다른 농사가 많기 마련이다. 양념이며 푸성귀 종류가 좀 많은가. 봄에 심어서 요즘 따 먹는 오이 호박 가지 고추 등등. 초가을에 배추를 비롯한 쪽파 무 당근을 파종하면 김장할 때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필요한 양념을 다 키워서 먹지는 못하더라도 소비가 많거나 애착이 가는 농사가 각자 다른 것 같다. 나의 경우는 풋고추와 풋호박 그리고 참깨 농사다.

양념 농사는 파종하고 수확해서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거의 여성농민의 수고로 이뤄진다(남편과 친하게 지내면 협조 정도가 다르다).

거의 모든 밭작물이 물빠짐이 좋아야 하지만 참깨는 유독 물에 약하다. 밭둑이나 경사가 있어서 비가 많이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 땅에서 탈 없이 잘 자란다.

논 옆에 칡과 갈대로 무성하지만 애써서 손보면 참깨 농사가 잘 될 곳이 있었다. 돌과 칡뿌리를 치우느라 너무 힘이 들어서 내가 꼭 이 짓을 해야 하나 싶어 그만둘까 싶다가도 손가락만한 두께로 커 있는 참깨를 상상하며 가꿨다. 폭 3m 길이 400m 정도의 참깨 전용 밭을 만들었다. 농지원부에 올리지 못하는 300평이 넘는 땅이 생겼다. 자잘한 성취감에 만족하던 취미가 직업이 되어서 힘에 부치는 모양새가 됐다.

참깨밭의 풀을 뽑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참깨 좀 떨겠다며 한마디씩 했다. 참깨는 떨어봐야지라 대답하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될 정도로 탐스럽게 자랐다. 농사꾼한테 농사 잘 지었다는 칭찬이야말로 어깨가 하늘로 치솟는 자부심 아닌가. 풀을 매면서 솎아주고 장마를 대비해서 비싼 유황칼슘까지 뿌려줬다(남편이 비료살포기로 뿌려줬다).

하얀색 바탕에 보랏빛이 도는 참깨꽃이 예뻐서 들여다보다가 또 뒤돌아서 다시 봤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줬으니 한 달 후에는 땀 좀 흘리면서 참깨를 베야겠구나 싶었다. 참깨는 이슬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베야 참깨가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새벽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작은 막대기로 타닥타닥 때리면서 참깨를 털 때의 손맛은 그야말로 짜릿하다. 참깨가 실하면 좀 과장해서 쌀알만 한 참깨가 우수수 쏟아진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처럼 모양 그 자체로도 훌륭한 풍경이다.

사실, 생계를 위한 경제작물을 가꿀 때는 비용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작물의 성장 과정을 차분하게 즐기지 못하게 된다. 어서 크라고 병들지 말라고 무언의 압박을 해대는 것 같다. 그러나 텃밭이나 양념 농사의 경우에는 자투리 땅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부담이 적다. 정작 내 자식 키울 때는 사는 게 바빠서 예쁜 모습 눈에 담지 못하다가 할머니가 되어서는 손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의미를 새기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농사의 진수는 텃밭이나 양념 농사에 있는 것 같다. 파종하면서 기대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부드러운 눈길로 응원하고 수확의 고마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3일 동안 쏟아진 비가 500mm가 넘으면서 논 주변의 일대가 3일 동안 물에 잠겼다. 그야말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였다.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어머나! 세상에 하다가 3일이 넘게 물에 잠긴 모가 보이지 않으니 어쩌나어쩌나! 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게 되었다. 흙탕물을 뒤집어 쓴 모가 드러나자 발 뻗고 잠도 잘 수 있었다. 나락 모가 되살아나 준 사실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느라 그 옆에서 재잘거리는 소녀들처럼 자라던 참깨는 잊고 있었다. 논을 살피러 갈 수 있을 때 보니 확실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곱기가 처연하기까지 하던 참깨 꽃밭이 갯벌처럼 변해 있었다.

참깨를 베고 털면서 땀 흘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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