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예산과 유산

  • 입력 2021.08.15 18:00
  • 기자명 이희수(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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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경북 봉화)
이희수(경북 봉화)

어느 현자(賢者)가 사는 마을에 어려운 유산분배 문제가 발생했다. 사정은 이렇다. 아들 삼형제를 둔 아버지가 유산으로 17마리의 소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장에는 맏아들에게는 절반의 소를, 둘째 아들에겐 맏아들의 3분의 2를, 셋째 아들에겐 둘째 아들의 3분의 1을 물려준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소를 죽여서 고기를 나누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다.

어떻게 17마리의 소를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절반으로 나눌 수 있으랴,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세 아들이 머리를 맞대고 온갖 궁리를 다해봤지만 아버지가 남긴 문제의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마을의 현자를 찾아갔다. 물론 현자는 삼형제의 소망대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였다. 덕분에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었고, 자칫 유산분배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소들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떠도는 이야기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골 동네의 이장에게도 유산분배 문제만큼이나 어려운 예산분배 문제가 1년에 한 번은 찾아온다. 농로 포장이나 하천 정비, 농업기반시설 확충 등 ‘소규모 주민숙원사업’의 대상지를 결정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민숙원사업은 희망하는 마을 주민들의 수요는 많은데, 주민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만큼 예산이 넉넉하지 못하여 1년에 겨우 한두 개의 사업만 선정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을 주민들의 요구들을 검토하여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은 무척 곤혹스럽다. 물론 형평성이나 공익성과 같은 나름의 선정기준도 있고, 부녀회장, 새마을지도자, 반장, 전임이장 등의 선정위원도 있지만, 울타리 없이 살아가는 작은 시골 동네의 특성상 거의 모든 이웃들과 사적으로 쌓인 관계가 두터울 수밖에 없는데, 이 고만고만한 인연들의 고만고만한 요구들을 펼쳐놓고 선후를 결정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래도 마냥 미룰 수는 없는 일이어서 고민 끝에 선정위원들과 함께 어렵사리 결정은 했지만, 선택받은 요구보다 배제된 소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마음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그런데, 현자는 이렇게 어려운 유산분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해법의 열쇠는 소 한 마리에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이 기르던 소 한 마리를 삼형제에게 건냈다. 그러자 17마리의 소는 18마리가 되었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맏아들은 절반인 9마리를, 둘째 아들은 9마리의 3분의 2인 6마리를, 셋째 아들은 둘째아들의 3분의 1인 두 마리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남은 소 한 마리는 원래 주인인 현자의 몫이었다. 자칫 절반으로 나누어질 뻔했던 소 한 마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소를 내어놓는 현자의 기발한 발상이 눈길을 끈다. 혹자는 아낌없이 소를 내어놓는 현자의 행위에서 희생과 헌신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현자의 놀라운 셈법의 핵심은 예산의 증액과 다르지 않다. 동화나 우화 같은 허구의 세계가 아닌 현실 속에서 17마리를 18마리로 늘리지 않고서는 살아 있는 소를 공평하게 나누는 비법이란 있을 수 없다. 속담처럼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 미덕이 잠시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소가 피를 흘리지 않고, 예산이 예산의 구실을 하려면 최소한의 규모는 유지해야 한다.

흔히 국민의 세금을 혈세라고 한다. 아마도 피 같은 세금이란 의미일 것이다. 나라 살림에 운용되는 예산은 이러한 혈세로 채워질 것이다. 또한 예산은 납세자가 유언장 없이 나라에 맡긴 유산이기도 하다. 실제로 자신이 납부한 세금이 소진되기도 전에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허다하다. 이 경우 이들이 남긴 예산은 말 그대로 그들의 유산인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마지막 유산이 포함된 나라의 예산이 한 푼도 허투루 집행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17마리 소의 분배처럼 현자의 지혜가 동원되어야 하는 어려운 수수께끼 풀이도 아니길 바란다. 다만 언제나 낮은 곳부터 채우는 물처럼 올해 주민숙원사업에 선정되지 못한 우리동네 할머니의 작은 바람도 채워주는 조금은 따뜻하고 넉넉한 예산 집행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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