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농민에게 농가공의 권리를’, 소규모 농가부엌법 토론회를 마치며

  • 입력 2021.08.08 18:00
  • 기자명 오순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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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이 정책위원장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광주전남연합)
오순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

 

지난달 29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은 소규모 농가부엌법 제정에 관한 토론회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표명해 주셨다. 현재의 식품위생법이 규정하는 해썹(HACCP) 기준 등은 식품의 안전성만을 강조해 과도한 위생·시설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중소농과 고령농이 대부분인 농촌에서는 이러한 식품기준을 맞추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가공식품과 공공급식의 공급주체를 대기업이 장악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전통적인 먹거리 체계가 무너지고, 각종 첨가물과 방부제, 수입농산물을 원료로 한 먹거리의 난립은 국민 건강을 해치고 있다. 대량의 수입농산물 유통으로 인한 탄소발생은 기후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지역푸드플랜으로 ‘식량의 생산-소비-유통-폐기-식생활교육’에 이르는 지속가능한 먹거리 체계를 세우자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식품위생법」아래에서는 농민들의 농가공품이 설 자리는 없다. 69개 지자체가 소규모 농가공 조례를 제정해 소규모해썹 등을 도입하고 시설기준을 낮추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위법에 막혀 실효성이 없다.

소규모해썹 기준을 갖추기 위해선 몇억원에 달하는 시설투자가 필요하고, 재료의 투입량 및 산출량, 판매량 등을 매일 꼼꼼히 기록할 인력도 필요하다. 농가에선 이러한 이유로 소규모해썹을 유지해 나가는 것 또한 힘들다고 한다.

전여농은 미국 49개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소농식품법(cottage food law)을 들여다 보았다. 미국의 농민들은 농가부엌에서 식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한다. 위생 시설기준의 적용을 받지 않고 농민시장이나 인터넷에 직접 판매할 수 있다. 다만, 지역별로 일정한 판매액 상한을 두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연간 5만달러, 약 5,600만원 이하가 기준이다.

농사는 1차 농산물 생산 외에도 가공, 판매까지 포함된 의미를 가진다. 최근 지역에는 로컬푸드 매장이 늘어나고 있다. 소농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가까이에서 공급받아 농민들은 소득을 올려 좋고, 소비자는 신선한 농산물을 공급받으며 장거리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까지 줄이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런 로컬매장에 소소하게 농민들이 직접 만든 미숫가루, 장아찌류, 김치류, 두부, 반찬류 등이 자유롭게 판매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업자 및 각종 판매·유통업 등록을 하고 시설기준을 갖추지 않으면 농가가 판매하는 단순 가공품은 모두 불법으로 취급돼 판매할 길이 없다. 최근 위생당국의 단속이 강화되고 있어 농민들의 다양한 손맛이 담긴 먹을거리는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농가 개별단위로 막대한 시설지원을 하지 말고 거점별로 공동가공센터를 공공기관이 만들고, 농민들은 언제든 그곳에서 원물만 가져가 가공해서 판매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지금 전국에 몇 개의 가공센터가 있지만, 거리가 너무 멀거나 순번을 타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특히 소규모 농가는 이용하기가 더욱 힘든 실정이다.

우리의 먹을거리를 누가 결정하는가? 농민들에게 가공한 권리를 누가 빼앗고 있는가?

기후위기 시대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탄소발생을 저감하기 위해서라도 농민들의 농가공에 대한 권리를 돌려줘야 한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우리도 농민들에게 농가공 시설기준 및 판매기준에 대한 면제를 두는 소규모 농가부엌법을 하루 빨리 제정해야 한다.

농민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 게 어디 그뿐이랴. 굶어 죽을지언정 씨앗은 남긴다는 농민들의 종자에 관한 권리도 없어진지 오래다. 종자회사가 공급하는 종자를 심고, 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농법만이 자리잡아 왔다. 기후위기시대,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지역 토질에 맞는 토종 종자를 개량해 지속가능한 생산체계를 만드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오는 9월 유엔 푸드시스템 장관회의가 준비되고 있다. 먹거리 빈곤층을 없애고, 각국의 지속가능한 먹거리체계 조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경제포럼이나 유전자조작농산물을 보급하고자 하는 기업들이 논의의 중심을 잡고 있어 식량안보만 강조해 또다시 다국적 기업 중심의 공급 방식만을 유지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래서, 식량주권을 강조해온 비아캄페시나와 먹거리시민사회 조직들은 보이콧을 선언하고 있다.

농지와 식량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는 공공농업으로의 전환, 생산을 하는 농민들을 공직자로 대우하고 궁극적으로 식량주권을 실현하고 농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농민기본법의 제정. 이것이 우리가 지속가능한 먹거리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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