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토종씨앗을 지키는 삶으로

  • 입력 2021.07.18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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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지역에서 토종씨앗 모임을 시작한 지 5년차다. 여성농민회 언니들 특유의 바지런함과 추진력으로 12개 읍·면 수집조사를 마치고, 올해 드디어 씨앗도감 작업을 위해 채종포에서 증식 작물을 재배하며 기록하고 있다. 나눔 받은 토종씨앗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한 곳에만 심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나누어 기른다.

나도 붉은어금니동부, 흰찰수수, 비단팥, 물레콩 등의 증식을 맡았다. 작물별로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에 담는다. 재배특성과 모양은 고정되어 일정한 편이지만, 어떤 원인에 의하여 다른 특성이 튀어나오기도 하니 파종 날짜부터 개화, 채종하기까지 생육 과정을 구체적으로 적어 정보를 모은다.

평소 농사지을 때는 이렇게 작물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물에 불리니 하루만에 동부콩이 배꼽 아래서 어린 뿌리를 빼꼼히 내미는구나, 흰동부콩 줄기 마디에도 붉은 무늬가 있구나, 물레콩 어린 순에도 털이 있구나’ 자꾸 관찰하며 기록하니 새롭다.

토종씨앗을 수집하며 만난 농부들은 재래종 작물로 음식을 해야 맛이 있기 때문에 수십 년간 지어오셨다고 하는데, 과연 나라도 입맛을 사로잡은 작물에 빠져 뚝심 있게 한 품종을 지켜낼 수 있을까 하고 돌아보게 된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물론, 입맛이란 변하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무조건 ‘토종은 맛있다, 이 맛이 진짜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한 맛이 있다는 것, 이 음식을 먹고 탈 없이 건강하게 살아오신 어른들의 삶으로 증명된 씨앗인 것이다.

지금은 종자가 황금보다 값이 비싸졌다지만 오히려 쌀 한 톨이 귀한 줄 모르게 되었고, 먹방과 쉐프가 대세이지만 음식물 쓰레기는 큰 폭으로 늘어난 모순된 시대다.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 다양한 먹거리가 늘어나고 농산물이 넉넉하게 재배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먹거리의 질적인 성장보다는 소비 지향적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참된 혁명의 시작을 농사라고 생각했다”는 어느 농부의 말처럼,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귀농했다. 그러한 농사의 시작은 씨앗이었다. 혁명과 씨앗은 연결되어 있다. 토종 씨앗은 생존과 전통, 문화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씨앗은 농민의 업과 인류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에너지의 결정체이자 지구 생명체 진화에 핵심 요소이다. 그래서 나눔이 원칙이다.

사실 토종이란 자생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외래 귀화종도 수대에 걸쳐 토착화되었다면 토종씨앗이라고 명명하는 열린 개념이다. 토종이냐 아니냐 족보를 따지는 일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개량종과 달리 십수년 이상 지역 환경에 적응해 대물림해온 씨앗으로 고정된 특성을 가진 품종으로 정리를 해보면 어떨까. 오랜 기간 심기고 거두어져 끊임없이 나누어 흩어진 씨앗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톺아보면 우리네 밥상 문화를 주도해온 씨앗들을 우러르는 마음이 생긴다.

씨앗 수집 활동 중에는 이러한 씨앗 보물을 나눠주시는 할머니의 굵고 비틀린 두 손을 사진으로 남긴다. 거친 손이 주는 울림은 특별하다. 씨앗 받는 농부는 가보처럼 이어온 재래종을 매년 밭에 심어 그 고유한 형질을 지역 환경과 상호 작용하며 씨앗의 생명력을 확장시키는 셈이다. 외진 곳에서 꿋꿋이 씨앗을 대물림 해오신 할머니, 할아버지 농부님들이 우리 농업계에 유산을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아 그 굽은 허리를 조금이나마 펴보시길 바란다.

마을에서 수집한 토종씨앗으로 1년간 초등학교 생태 텃밭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동네에 계신 씨앗 할머니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다. “행복과 재미, 생명줄을 주셔서 아주 감사해요, 언젠가 보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께서 토종씨앗을 주셔서 조상님들이 드시던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커서도 토종씨앗이 사라지지 않게 노력하고 많은 사람에게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또박또박 편지를 쓰는 학생들 마음에도 할머니가 주신 씨앗이 자라고 있다. 세대가 연결되는 씨앗 한 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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