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농부와 잡부

  • 입력 2021.07.18 18:00
  • 기자명 김석봉(경남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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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경남 함양)
김석봉(경남 함양)

이장으로부터 하반기 노인일자리사업에 참가해 보라는 전화가 왔다. 농사일이 많아 그런 일에 나갈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른 봄부터 이웃들이 노인일자리사업에 동원되고 있었다. 일주일에 사흘, 하루 세 시간씩 마을 골목길 정리와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한창 밭 장만할 시기에 이웃 농부들이 청소한답시고 골목을 몰려다니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었다.

조그만 마을에 무슨 할 일이 그리 많다고 여덟이나 되는 이웃이 하루걸러 한 번씩 마을 청소 일에 나서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업하는 날 잠시 나와 골목 한 바퀴 돌다 보면 삼만 원 정도 되는 품삯을 받았다.

이 산골마을에서 한 달 삼십만 원이 적은 돈인가. 농사일이 며칠씩이나 밀려도 서로 이 일에 나서려 했다.

상반기 노인일자리사업에 참가한 이웃은 열세 명이었다. 마을청소에 여덟, 마을입구 요양원 잡일에 셋, 마을 보건진료소 허드렛일에 둘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웃 농부가 그 일에 나가다 보니 밭 장만할 시기가 되어서도 논밭이 한산했다.

저렇게 해서 농사가 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다 이웃마을 트랙터 불러 밭갈이라도 하는 날이면 서로 먼저 하려고 다툼이 일기도 했다.

하반기 노인일자리사업에 나선 이웃 농부들은 무려 서른 명이나 됐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나섰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매달리니 그들이 작업하는 날은 논밭이 텅텅 비었다.

매주 월, 수, 금요일이 작업하는 날이었다. 그날이면 골목에 연두색 조끼를 입은 청소부대가 나와 득시글거렸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조그만 마을에 무슨 할 일이 그리 많겠는가.

월 삼십만 원의 위력은 대단해서 이웃 농부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허리가 아파서 끙끙대던 골목 안 서씨, 두 무릎 인공연골수술로 지팡이에 의지하는 박샌댁마저 이 일에 나섰다. 서른 마지기 잡곡농사에 매달려온 이씨는 부부가 함께 나섰다.

그렇게 일주일에 사흘 오전시간을 노인일자리사업에 매달리니 쉼이 있을 턱이 있나. 서늘해서 일하기 좋은 오전시간은 그 일에 나가고, 햇볕 쨍쨍한 오후시간에 자기네 논밭 일을 하자니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고 처절하고 가련해 보였다.

“도대체 이 나라는 돈이 얼마나 많아서 저러는 거야.”

밖에 일보러 나갔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골목에 득시글거리는 노인네들을 보며 택시기사가 혀를 찼다.

“그러게요. 그 동네는 안 그래요?”

“아이구, 말도 마쇼. 우리 동네도 성한 사람은 다 저리 하고 다녀요.”

“엑스폰가 뭔가 한다고 예산이 넘쳐나서 저 난리라네요. 게다가 내년에 군수 선거도 있잖아요.”

“농사라도 끝내놓고 저런 일을 하든지. 이 더운 날씨에 저 일 하고 또 농사일도 하려니까 노인들 건강이 남아나겠어요?”

“저리 일하고 들어가 봐야 밥이라도 따뜻이 차려주는 사람이 있나. 찬물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 먹고 또 밭으로 나가겠지.”

나도 덩달아 혀를 찼다.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마을회관 앞 ‘무더위쉼터’라는 간판이 불타는 햇볕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농사가 어디 쉬운 일인가. 농부가 그리 한가한 사람인가. 농사는 나랏일의 근본이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지 않은가. 노인일자리라는 미명 아래 농사는 일당 삼만 원에 밀리고, 농부는 잡부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그런 예산으로 농부들 점심식사 한 끼라도 건강하게 차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런 예산으로 젊은 농부들 고용해 하루 서너 시간씩이라도 노인 농부의 농사를 도와주는 것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굳이 저런 정책 같지도 않은 정책으로 예산을 쓰느니 그 정도의 돈은 거저 줘도 되지 않을까. 코로나 시절 정부가 쓰는 재난지원금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생각하면 그동안 이리 밀리고 저리 따돌리면서도 꿋꿋이 이 땅을 지켜온 농부에게 얼마간 용돈쯤은 챙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농민수당’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농부를 잡부로 취급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농부로서 자존감과 품격을 잃지 않도록 농민수당, 농민기본소득 정책을 마련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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