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일 다 했냐고 묻는 친구에게

  • 입력 2021.07.11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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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보리타작을 하고 서둘러 모내기를 끝내자마자 뒷정리는 미뤄두고 호미를 들고 대파밭으로 갔다.

잦은 비에 답례하느라고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오메! 징한 것들이다. 모내기 시작하면 한동안 밭에 올 수 없을 것을 예상하고 떡잎이 벌어지고 있는 풀까지 없앴는데 그 며칠 사이에 풀들이 도둑처럼 대파밭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침 5시에 집을 나서서 오후 8시까지 대파밭을 걷다 보면 하루에 몇 km를 걷게 되는지 측정해 보지 않았지만 그냥 피곤하다. 만사가 귀찮다.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도 반갑지가 않다. 오후 6시쯤에 친구가 전화를 했다. 모내기 했냐고 묻길래 어제 끝냈다고 대답했다. 그럼 일 다 했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모내기 하느라 수고했으니 맛난 것 사주겠다고. 내가 여유 있게 친구들 만나서 저녁 먹을 시간이 있다면 한 달째 묶여만 있는 개들한테 콧바람 쐬어주는 게 우선일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친구의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서운했다. 직업은 다르지만 같은 지역의 농촌에서 살고 있으니 밭농사 많은 여성농민의 하루 일정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알 만한데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아침 5시 전후에 일어나서 빨래를 널어놓고 고양이들(중성화수술을 하지 않아서 개체수가 많아졌다)과 두 마리 개들에게 사료를 주고 개똥만 치우고 집을 나선다. 마당에 감나무에서 떨어진 애기 감들이 쌓여가지만 치우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둔다.

트럭 라이트를 켜고 운전하면서 밭에 도착할 때까지 쫓기듯 달린다. 창고 냉장고에서 두유를 꺼내 마시고 근육이완제가 들어 있는 소염진통제를 먹고 대파밭으로 간다. 무료한 시간에 동무가 되어 줄 소형 라디오를 벨트지갑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대파밭의 풀을 없애야 장마 전에 남편이 배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바쁘다. 점심은 시간을 아끼려고 식당에서 국밥이나 자장면을 갖고 와서 논에 있는 남편을 불러서 먹는다.

라디오에서는, 야당 대표로 사상 최초로 최연소인 사람이 선출됐다고 시간마다 알려준다. 능력위주의 공평한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단다.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서 당 대표가 된 사람답다 싶다. 능력위주가 어떻게 공평하냐? 노력위주가 공평하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땀 많이 흘리며 노력을 한 사람 위주의 사회였다는 거야? 아니면 상위 1%도 부족해서 0.1%의 상위계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냐고! 그렇게 라디오를 상대로 말대꾸를 하면서 풀을 거칠게 뽑아낸다.

3~4일에 걸쳐 대파밭의 풀을 없애고 참깨밭 그리고 들깨밭의 풀도 뽑아내야 한다. 또 3~4일의 일정을 예상하고 있다. 다시 이틀 정도는 접모도 해야 한다. 논 입구에는 이앙기가 제대로 모를 꼽지 못해서 사람이 모를 심어줘야 한다. 그 부분을 심는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휑하니 비어 있는 모양이 눈에 거슬려서 결국은 심게 된다.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나고 다시 대파밭으로 가면 풀들이 너풀너풀 환영한다.

오후 8시까지는 풀을 뽑다가 퇴근길에 두부와 계란 그리고 캔맥주 한 묶음을 사서 집으로 들어온다.

빨랫줄에 널어놨던 작업복을 걷어 놓고 장독대에 걸터앉아서 캔맥주를 딴다. 배가 고프던 참이라 술술 잘 넘어간다. 저녁밥 먹고 먹어야 할 소염진통제 대신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둑해진 마당에는 떨어진 감잎과 감들이 아침보다 더 많이 쌓였다. 다시 미뤄두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대충 씻고 어제 저녁밥을 먹고 담가 뒀던 설거지를 하면서 저녁밥을 한다. 밥상을 차리지도 못했는데 저녁 9시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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