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어르신, 어디까지 가세요?

  • 입력 2021.07.04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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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1리에 사는 보람이는 3년 전 귀농해서 작년부터 차를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3리에 사는 승미는 작년에 귀농과 동시에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잡았다.

2리에 사는 나는 4년 전 귀농하면서 운전을 다시 배웠다. 우리는 각각 아이들을 위해서, 장을 보기 위해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운전을 시작했다.

지난달 3리에 사는 중학교 동창 승미에게서 전화가 한 통 왔다. “나래 어머니 오늘 생신이야? 우리 동네에서 일하시다가 아버지가 바쁜 일이 생겨서 (차 끌고) 먼저 가셨다는데~ 어떡하지?” 서울 사는 동창 나래를 대신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외식을 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댁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 문득 ‘어머니가 운전을 하셨더라면 오늘 같은 날 아버지가 바쁘셔도 직접 운전해서 손주도 보러 가시고, 오랜 지인들도 만나러 다니셨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춘천 소양로가 고향이시다. 지금도 춘천 길을 헤매실 때가 많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닮았다. 엄청난 길치이다 보니 홍천 밖으로 나가는 일에는 부모님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 대신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우리 동네에서만은 베스트 드라이버로 동네 어르신들의 발이 종종 되어 드리기도 한다.

번거롭긴 하지만 가능하면 꼭 어른들을 모시고 다니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매번 부모님 차로 다니다가 시간이 안 맞아서 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병원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하루에 몇 번 안 다니는 버스를 겨우 시간을 맞춰 탔는데, 좌석은 불편하고 굽이굽이 길에 덜컹거리며 온 동네를 다 들르는 버스를 타고 내리니 병원을 다녀온 효과가 다 사라지고 다시 아픈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다녀왔던 터라 차를 끌고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내내 같이 버스를 탔던 할머니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버스가 안다니는 길로 또 걸음을 옮기시길래 여쭤보니 무릎 약 타러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동네에서는 팔지 않거나 다만 1,000원이라도 더 싼 먹거리를 사들고 오시느라고 짐이 한가득이란다. 허리가, 어깨가, 무릎이 아파 병원에 약을 타러 다니시면서 그 먼 길을 그 무거운 걸 들고 다니시는 악순환이다. 댁 근처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서는 내게 온갖 복에 복을 더해주시면서 연신 감사 인사를 하신다.

승미도, 보람이도, 나도 길에서 늘상 하는 말이 있다. “어르신, 어디까지 가세요?” 가는 길이든 안가는 길이든 일단 모셔다 드리곤 한다.

밭에서 관리기를 끌고 나오는 날이면 기특함과 부러움으로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곤 한다.

“내가 요즘마냥 여자도 배울 수 있고 면허도 딸 수 있는 시절을 살았더라면 그깟 운전이 대수겠어. 트랙터며 이앙기며 다 내가 배워서 했지! 어차피 내가 다 하는 밭일 고거라고 못했을까. 근데 우리 젊었을 때는 그런 일은 여자가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아예 엄두도 못 냈지. 그런 일은 다 남자만 해야 되는 일인 줄 알았어.” 아직 기회가 많은 내게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라신다. 일흔이 넘은 어머님들껜 이제는 지나가버린 기회들 말이다.

그 시절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배움의 기회는 그들이 나이 들어서까지 발목을 잡아 거동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은 좋아졌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도시에서는 지하철, 버스, 가끔은 택시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곳에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인도조차 없는 아스팔트 도로를 아슬아슬 걷는 수밖에 없다. 고령운전자 면허를 갱신하지 못한 할아버지도, 운전을 할 줄 모르는 할머니도 남 얘기가 아니다. 어느 날 손가락이라도 다치는 날에는, 오른발이라도 접질리는 날에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차로 15분 남짓인 면사무소 다녀오는 길이 이런저런 생각에 오늘도 참 멀게 느껴졌다.

많은 여성들이 농촌으로 들어오길 주저하는 이유로 가부장적 문화와 농촌 여성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이유로 든다. 우리에겐 더 많은 노력과 변화가 필요하다. 그나마 나는 조금 더 나아진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더 많은 도전의 기회와 조건이 허락되는 농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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