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씨앗처럼

  • 입력 2021.06.20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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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생태농에 뜻을 두고 귀농을 준비하던 때에는 ‘자족하는 농부라면 영농일지를 기록하고, 이웃과 교류하고, 매일 아침에 밭이나 산으로 출근하여 농사짓고 채취하면 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 외의 시간은 지역에서 토종씨앗을 수집하고 장구도 치며, 비나 눈이 오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는 삶을 바랐는데, 연고 없이 무작정 내려간 지역에서 뜻밖에 여성농민회 언니들의 끈끈한 도움을 받아 그 꿈은 예상보다 수월하게 이룰 수 있었다.

2,000여 평을 친구 셋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기계 없이 농사지으며 살았고, 결실이 잘 맺히면 다행이었지만, 소출이 적으면 적은대로 품일을 더하며 먹고 살았다. 우리네 밥상은 나름 풍요로웠지만, 나가고 들어오는 돈의 흐름은 거의 없었다. 이를 지켜본 한 농부는 우리에게 진짜 농부가 아니라고 했다. 사실 임대차 계약서 없이 땅을 부쳐 농지원부나 농업경영체 인증서가 없기에 ‘소농’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농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뒤로 10여 년이 지나, 농업경영체와 농지원부를 장만한 지금도 고민한다. 이 시대에 참농부의 길은 무엇일까.

오롯이 농사를 지으며 날것의 삶으로 자연과 밀접한 교감을 나누는 일상을 꿈꾸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경제에 발맞추다 보니 시간과 공간의 구성이 꽤 달라졌다. 해뜨기 전 새벽같이 밭에 나가던 몸은 아이들을 등교시키느라 부엌에 있으니, 해가 높이 뜬 9시가 넘어서야 집안 정리를 뒤로 한 채 돌이 안 된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선다. 아이들이 하교·하원하기 전까지 일할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은 가장 볕이 뜨겁다. 그렇게 농사의 규모가 줄었고, 내 먹을 것 위주의 농사보다 판매하는 농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밭일 외에도 소규모로 식품 제조와 가공을 하고, 직거래 택배를 포장하고, 홍보하고, 쇼핑몰을 관리하는 등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로 분주해졌다. 살아있는 농사의 가치를 값으로 계산해내는 것은 여전히 익숙지 않은 일이지만, 농사와 장사를 오가며 그 방법을 찾아간다. 자본주의 시대에 농부로서 지속가능한 경제성을 논하는 것과 시장에 팔릴 만한 작물을 심고 거두는 사람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깨어있는 일이 같이 간다.

주변을 보면 봄부터 지출은 계속 발생하는데, 수입은 작물이 자라나면 거두어 갈무리를 마치고 나서야 들어오니 빚지기 십상이다. 나중에 목돈이 들어오지만, 그간 쓴 빚을 갚으면 손에 쥐는 돈이 별로 없거나, 본전치기가 어려운 때도 다반사다. 동네에는 코로나로 외국인 일꾼들이 빠지니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어려워하신다. 이래저래 계획대로 되는 농사는 없고, 농부 지인들은 나름의 보릿고개를 넘어가며 버티고 있지만 구조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이따금 고단함에 삶이 흔들릴 때면 선대에 자신이 굶어 죽더라도 씨앗을 지켜낸 과학자와 농부가 절로 떠오른다. 씨갑시 농부는 수십 년간 묵묵히 고유한 씨앗을 보존하고, 나누어 공유하셨다. 지역에 토종씨앗 수집을 다니다 보면 한 할머니의 대물림 씨앗은 그 마을이나 아랫마을까지도 퍼져있는 경우가 많고, 처음 만난 수집단에게도 한 움큼씩 씨앗을 나눠주시는 거친 두 손을 마주할 때면 존경심으로 뭉클해진다.

씨앗은 누구라도 심어 거두어 먹을 수 있어야 하기에, 농부만이 아니라 인류에게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할 가치가 있는 유전자원이다. 농지가 투기 대상이 되고 마시는 물에도 값이 매겨지고 로열티가 붙은 황금종자가 되었지만, 농부에게 종자주권이 있음을 증명하는 토종씨앗 나눔은 계속되고 있다. 씨앗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여성농민들은 현장 실험실인 밭에 농사를 지음으로써 그 지역과 날씨에 보다 적응한 유전자를 축적한 생명을 키워나간다.

씨앗은 아주 작지만 한 알을 심으면 수백 배 이상의 결실을 맺는다. 경이로운 밭에서 작물이 주는 너그러움에 무시로 감동하는 씨앗 농부는 자연이라는 선물경제와 경쟁으로 치열한 시장경제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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