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빗장을 풀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

  • 입력 2021.06.06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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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마을에서 사무장으로 마을살림을 해온 지 어느새 3년이다. 마을에 청년이 귀한지라 귀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장님이 같이 일 좀 해야겠다 하셨다. 마을 통장과 영수증만 잘 관리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막상 해보니 신경 써서 챙길 일들이 꽤 되었다. 새해가 되면 윷놀이도 한판 벌이고, 삼복더위에는 온 마을 식구들이 함께 더위를 이겨내도록 닭도 한 마리씩 잡숴야 하고, 봄·가을로 있는 마을 청소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총회 등 굵직굵직한 행사만도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로 오프라인 행사들은 취소되었지만 마을회관 관리비나 부역 준비 같은 마을 살림은 여전히 돌보아 오고 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마을 개발위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이 때 서기 역할을 하면서 마을 일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상수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누구네 집에 어떤 경조사가 있는지, 지역에서 환경문제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등의 다양한 정보와 우리 마을의 역할 등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이 오늘날 이 마을이 있기까지 이렇게나 많은 일들을 고민하고 결정해 왔겠구나~ 라는 생각에 새삼 존경과 감사함을 느꼈다.

청년 여성 농업인 중에 연고지도 없이 지방의 한 마을로 귀농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얼마 전 자신이 그 마을의 이장이 되겠노라고 했다. 그 친구의 선언을 듣고 내 안의 불편함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4년 전 농촌으로 가서 농사를 짓겠노라 선언하고 다니던 때에,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이 “이장 하겠네”라고 하면 나는 늘 “난 부녀회장 할거야”라고 대답하곤 했다. 마을 대소사마다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고, 음식을 장만해서 먹이고 하는 일들이 성격에도 맞고 원했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이장’이라는 직함은 ‘어른, 남성’의 몫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내 스스로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해왔지만 이장이라는 제도 앞에서 내가 갖고 있는 인식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마을의 장은 마을 사람들의 안전과 인권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기술적 문제들부터 문서 혹은 관계적 문제들까지 모두 직접 해결할 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혹은 어딘가에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지원하는 사람, 마을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계승하고 필요한 것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 사고하고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데에는 남성, 여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머리로 하고 지금껏 배우고 살아왔음에도 나는 ‘이장은 남자들이 시켜줘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놓지 못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오랜 시간 다양한 경험을 했음에도, 농촌에서 보고 자란 나는 남성이 대표가 되고 ‘장’자리를 맡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갈 농촌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시간과 공을 들이고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해야 함은 이러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해 돌아보고 나아가는 일. 앞으로도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기 위해 많은 부분을 할애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나는 부녀회장은 고사하고 부녀회에 가입조차 할 수 없다. 부녀회원은 남편이 있거나 가입 당시 남편이 있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녀회장이 되겠다는 포부가 가당치 않은 것이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내 스스로 걸어둔 농촌에서의 성역할에 대한 빗장을 풀어나가기 위해 더 많이 배우고 잘 훈련돼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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