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쟁고아② 전쟁이 있었고 고아들이 있었다

  • 입력 2021.05.30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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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멀지 않은 곳에서 간간이 포성이 울린다. 이따금 전투기의 굉음도 들려온다. 세 살 아니면 네 살이었던 상열이, 네 살 아니면 다섯 살이었던 누나 도화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양로원이었다. 남자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이 양로원에서 저녁밥을 먹고 하룻밤을 자야 하니까 다들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는 아이들을 양로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불편하시더라도 오늘은 이 애들하고 함께 지내야 합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에요. 어이, 거기 밥 배식하는 사람! 이 난리 통에 밥그릇이 어딨어. 깡통에다 국하고 밥하고 한꺼번에 대충 부어서 나눠주라니까!

이상열씨가 뒷날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그가 누나와 함께 하룻밤을 지냈던 그 곳은 서울의 광나루에 있던 양로원이었다. 그런데 누나의 손을 꼭 잡고 들어가서 깡통에 든 국밥을 먹었던 장면은 떠오르는데, 대체 어떤 경로로 그 양로원까지 흘러갔는지는 그의 기억 속에서 감쪽같이 지워지고 없다. 그의 누나인 최도화 씨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할머니들…포탄 소리…깡통 밥…기억이 토막토막이에요. 하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식사 후에 창밖을 보았는데 한강을 물들인 저녁노을이…참 고왔어요.”

이상열 남매와 같은 행로를 거쳐 용주사에 수용된 고아들 중에는 강원도 출신이 유독 많았다는데, 그렇다면 남매 역시 강원도 어디에서 부모와 헤어져 그 곳에 흘러든 게 아니었을까?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하지만 강원도가 어딘데 그 어린 나이에 서울 천호동에 있는 광나루까지 걸어갈 수 있겠어요. 양로원까지는 차를 타고 가지 않은 게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의 고향이 서울이나 경기도 어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상열 씨가 고향 찾는 일을 포기해버린 가장 큰 이유 역시,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의 끈이, 바로 그 광나루의 양로원에서 그 이전으로 한 뼘도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두 살 위였을 그의 누나 역시, 갑자기 가족과 분리되어 한데로 내몰렸던 충격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광나루 양로원에서의 깡통 저녁밥’이 돌이켜볼 수 있는 기억의 한계선이다.

-너희들, 남매라고 그랬지? 자, 요놈 갖고 저리 가서 자라.

가마니뙈기 두 장을 배분받아 한 장은 깔고 한 장은 덮고 새우잠을 청했다. 밤중에도 간간이 포성이 들려왔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그 어린 남매에겐 그날 밤이 다만 추웠을 뿐이다.

낯설고 험한 잠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이들은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포장을 덮은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자, 자, 먼저 탄 애들은 안쪽으로 더 들어가라. 아직도 탈 사람 많으니까 바짝바짝 붙어 앉으란 말이야! 시간 없어. 빨리빨리 태워!

-아저씨, 내 동생 좀 태워 주세요!

군복 입은 남자가 상열을 안아 올려 미군 트럭에 태웠다.

“몇 월 달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날씨가 꽤 추웠어요. 그나마 아이들을 워낙 많이 태워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어서 견딜 만은 했지요. 트럭 뒤쪽도 포장으로 덮어 가렸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어요. 덜컹덜컹…한정 없이 달린 끝에 내린 곳이 바로 용주사였어요.”

전란 중에 부모와 헤어지게 된 전쟁고아들을 마땅히 수용할 만한 시설이 후방에 따로 없었기 때문에, 급한 대로 사찰로 수송을 했던 것이다. 서너 살에 불과했던 꼬마 이상열의 고아원 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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