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도장이 하나라서 서러워라

  • 입력 2021.05.30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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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몇 주 전 어느 날 새벽에 마을이장님께서 마을방송을 통해 농업경영체 등록을 언제까지 하라고 안내를 하셨습니다. 기한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남편이 마음먹은 모날 아침에, 농업경영체 공동경영주로 등록하러 갈 참이라고 도장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하나뿐인 도장이 내 손에 없었습니다. 올해부터 협동조합 이사로 등재되어서, 사무실을 이전하려니 도장이 필요하다고 서울 사무실로 올려보냈기 때문입니다. 도장이 없다는 말에, 남편이 대뜸 어떻게 도장이 하나뿐일 수 있냐고, 매우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는 듯 놀라 했습니다. 아니 약간 짜증을 내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공동경영주로 등록하려는 섬세한 마음까지는 괜찮은 남편이었지만, 하나뿐인 도장에 대한 태도로 시시한 남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장이 하나뿐인 것이 정서적으로 뭐가 그리 문제가 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도장 쓸 일이라고는 통장을 갱신할 때뿐인데, 굳이 여러 개 만들어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섬광처럼 뇌리에 스치는 어떤 문제의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고서 도장의 개수로 여성농민의 삶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맞아요, 도장은 여러 개 필요하지요. 단 쓸 일이 많은 사람에 한해서 말입니다. 통상 도장은 부동산 계약이나 승계를 할 때, 또는 정책 사업신청을 하거나 갱신을 할 때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성농민이 부동산을 소유하길 하나, 농업정책 대상이길 하나, 그 어느 것에서도 도장을 쓸 일이 많이 없습니다. 여성농민이 부동산을 소유하게 될 때는 주로 남편이 사망하고서 승계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끔 새로 구입하는 농지를 아내의 이름으로 하기도 하고, 깨인 남성 중에서는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기도 한다만 현장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재산을 자신 앞으로 해달라고 했다가 대판 싸움이 났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었습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싸우면서까지 부동산을 내 명의로 갖겠다고 나서지도 않습니다. 누구 앞으로 있더라도 재산권 행사하는 데 문제만 없으면 되지 않냐는 것이 깔려있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사실 부동산이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있지도 않는데 재산권을 어떻게 행사하겠습니까? 그저 우리집 재산이다, 하는 정도의 이해를 하는 수준으로 여기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여성농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을 한다거나 투자를 해본 경험이 없이 평생 호미나 괭이 들고 농사일을 하는 것으로 농민의 삶을 채웁니다. 부채가 없는 것이 더 낫지, 그까짓게 뭐냐고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여성농민들은 신용이나 정책에서 소외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2012년 충청북도에서 처음 제안된 여성농민바우처 지원사업이 확산된 것도 여성농민단체에서 토론회다, 정책제안이다 해서 현장의 뜨거운 반응을 배경으로 몇 년 사이에 전국화된 것이고, 거기에 여성농민의 이름으로 자랑스럽게 도장 사용의 기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가구 중심의 농업정책에서 바우처 사업 신청하는 일 외에 여성농민이 농가를 대표하여 도장을 찍을 일이 만무하니 도장 하나로도 불편함을 못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도장이 몇 개냐가 그 사람의 진짜 사회활동 반경을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겠다 싶습니다. 사업 신청할 때면 다른 데에 맡겨진 도장을 대신해서 5,000원짜리 막도장을 파서 쓰다가 하나 늘어나고, 공동명의로 사업을 신청하는데 도장을 전해주기가 어려우면 또 막도장을 하나 파서 쓰는 것이고, 이래저래 도장의 개수가 많아진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집 잡물함에 남편 도장이 대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나 봐야겠습니다. 심지어 화물차 안에도 굴러다니고 있던데 말입니다. 제아무리 바깥출입이 많고 여러 가지 일을 해도 도장으로만 본다면 나 역시 정책적으로나, 또는 경제적으로 소외계층이 분명함을 실감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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