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공동체, 돌담으로 하나 되기

  • 입력 2021.05.26 21:35
  • 수정 2021.07.28 08:53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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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한 들녘에서 ‘밭담’의 복원 작업이 한창입니다. 대평리는 총 10km에 이르는 마을길의 사라진 돌담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복원할 생각입니다. 제주도에서 돌은 농업의 자원이자 관광업의 자원이니, 돌담의 복원은 마을공동체의 복원이기도 합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한 들녘에서 ‘밭담’의 복원 작업이 한창입니다. 대평리는 총 10km에 이르는 마을길의 사라진 돌담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복원할 생각입니다. 제주도에서 돌은 농업의 자원이자 관광업의 자원이니, 돌담의 복원은 마을공동체의 복원이기도 합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대평리는 제주도에서도 손꼽히는 해안 풍경을 지닌 서귀포시 안덕면 소재의 마을입니다. 1132번 지방도(제주일주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대평감산로를 통해 방문할 경우 그 아름다운 전경을 수평선과 함께 감상할 수 있지요. 마을 서쪽 영역 끝에 자리한 조그마한 항 ‘대평포구’는 그 옆에 병풍처럼 자리한 100m 높이 해안절벽 ‘박수기정’의 절경을 노을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한데, 그 덕인지 제주 올레길 제9번 코스의 시작점이자 8번 코스의 종점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대평리가 제주농업의 전통적 유산을 핵심 소재로 경관을 더욱 보강한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마을 중앙의 삼거리에서 교차하는 대평감산로·난드르로를 포함, 마을 전반에 걸쳐 돌담길을 다시 복원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세계농업유산에도 등재된 ‘밭담’을 포함해 제주 곳곳의 돌담길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제주도 개발의 역사가 오랜 세월 지속되면서 곳곳의 돌담은 훼손되거나 무너진 채 방치되곤 했는데요. 이를 마을이 스스로 다시 쌓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껏 주민 120여명이 벌써 네 번에 걸쳐 여기저기에 돌담을 쌓았고 제가 방문했던 날엔 5일차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해안 따라 걷는 올레길엔 보통 인근 마을 시가지로 곧장 향할 수 있는 작은 샛길들이 군데군데 가지처럼 뻗어 있는데요, 8코스에서 뻗어 나온 샛길 한 곳에 흔적만 남아버린 돌담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 이날 오전의 일과입니다. 

 

마늘밭의 무너진 담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창남 대평리 이장(오른쪽)과 주민들. 농경지 곳곳의 손상된 밭담들도 이번 사업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마늘밭의 무너진 담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창남 대평리 이장(오른쪽)과 주민들. 농경지 곳곳의 손상된 밭담들도 이번 사업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그 옛날엔 이걸 어떻게 쌓았을까

겉으로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아무렇게나 쌓아서는 절대 튼튼하게 유지될 수 없는 게 바로 제주 돌담입니다. 돌 하나가 채우지 못한 모자란 공간을 또 다른 돌의 모난 곳으로 채운다는 원칙을 수행하기 위해 석공은 아귀가 맞을 때까지 다음에 놓을 돌을 돌려대거나, 그도 아니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인 대체품을 찾아 해매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길 하나를 두고 양쪽으로 담을 쌓자니 자연스레 무리도 둘로 나뉘는데, 여러모로 양쪽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많은 인원이 자리한 왼쪽엔 딱히 지휘랄 게 없는 대신 풍부한 인력을 바탕으로 서로 머리를 맞대며 해결방안을 찾는 모양입니다. 돌을 이리저리 둬 봐도 방법이 안 보이면 그대로 선 채 잠시 쉬기도 하네요. 

 

‘돌챙이’가 없는 현장에서는 이리저리 돌을 맞춰보는 횟수가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인원이 달라붙어 부족한 경험을 대신하고 있네요.
‘돌챙이’가 없는 현장에서는 이리저리 돌을 맞춰보는 횟수가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인원이 달라붙어 부족한 경험을 보완하고 있네요.

 

“몇 날을 하니 다들 기술자, 돌챙이가 다 돼 버렸네.”

반면 오른쪽에선 백발의 노인이 자리 잡고 앉아 소수의 사람에게 저 돌을 가져오라 그 돌을 여기에 두라 지시하는데, 조수가 올려둔 돌을 그가 손대면 대개는 한 번에 들어맞습니다. 이날 모인 주민 대부분은 토박이 농민들이고 그 평균 연령도 적지 않습니다만… 돌을 특히나 잘 쌓아 업으로도 삼았던 전문 석공, 즉 제주말로 ‘돌챙이’로 불릴 만한 사람은, 여기서는 저기 오른쪽 길에 주저앉은 이 단 한 사람뿐이라고 합니다.

강상오씨는 이제 칠순이 가까운 농민이자 왕년의 돌챙이입니다. 그 아래로는 제주 사람이라고 해도 돌을 생업으로 만질 만큼의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요. 지난 1948년 벌어진 제주의 비극 ‘4.3 사건’ 당시 경찰이 요새를 쌓는다며 훼손했던 걸 사태가 진정된 이후 주민들이 다시 복원한 사례들이 가장 최근의 공사다운 공사랄 수 있으니, 지금의 50~60대는 눈이면 모를까 그 손이 돌과 친숙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온 마을의 담이란 담은 저 형이 다 만졌어. 여기저기서 담을 쌓으니 엄청나게 많은 밭을 가진 줄 알고 시집까지 갔으니까.”

 

올해 68세의 강상오씨는 이날 모인 사람들 가운데선 유일하게 ‘돌챙이’로 일해 본 숙련자입니다.
올해 68세의 강상오씨는 이날 모인 사람들 가운데선 유일하게 ‘돌챙이’로 일해 본 숙련자입니다.

 

돌 쌓는 덕에 결혼까지 했다는데, 알아듣기 버거운 제주방언으로 쏟아지는 증언에 당황한 제게 비교적 표준어(?)로 상세히 전해주시는 분까지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합니다. 하여튼, 돌 쌓는 기술이 전무한 저는 돌챙이가 계신 오른쪽 담에서 일하기로 합니다. 노쇠한 그를 대신해 기중기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중에 놓은 몇 개의 돌은 그로부터 아무 반응을 얻지 못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즉 별로 건드릴 것 없이 잘 놓았다는 말이 되겠죠.

“기자님도 하려고? 이거 보통 일 아닌데.”

자신 있게 나선 것도 잠시, 첫 돌을 드는 순간 내일부터 근육통에 시달릴 것을 직감합니다. 돌의 무게는 벼농사 못자리 때 들어 나르던 물 먹은 모판이나, 상품의 수박과도 비교가 되지 않네요. 수박 크기에 불과한 돌조차 팔을 굽힌 채로는 드는 것이 버겁고, 이보다 더 큰, 담의 가장 아래를 받칠 큰 돌들은 잠시나마도 들고 있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불과 75m 구간에 50cm 높이의 얕은 돌담을 쌓는데 성인 남성 20여명이 달려들었음에도 반나절이 소모됐으니, 트럭도 중장비도 없었을 시절 돌담으로 제주 흑룡만리를 만든 조상들의 집념에 새삼 경외감이 듭니다. 

 

 

 

돌담보다도 어쩌면 더 중요할
제주 마을공동체 복원하기

돌 쌓는 인원 외에 현장까지 돌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은 주민들도 있어 쉴 새 없이 트럭이 들어오는데, 돌이 너무 무거워 적재함 바닥을 긁다시피 하며 겨우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 무게 때문에 트럭 한 대가 실어 나를 수 있는 양이 의외로 적고 매번 이걸 길바닥에 놓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는데요. 그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트럭 위로 뛰어들어 돋보였던 이가 있었습니다.

 

이주민 배두환씨와 마을감사 고준영씨가 트럭에서 길바닥으로 돌을 떨어뜨리는 고된 일을 맡고 있습니다.
이주민 배두환씨와 마을감사 고진영씨가 트럭에서 길바닥으로 돌을 떨어뜨리는 고된 일을 맡고 있습니다.

 

“여기 온 후에 딱히 마을 일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도울 수 있어서 기쁘네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한창 일할 시간이라 나오기가 어려운데 저는 아내가 대신 봐 주고 있어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와인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배두환씨는 제주 입도 후 와인을 파는 가게 ‘슬기로운 와인생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솔선수범 뒤에는 그에 걸 맞는 마음가짐이 있었네요. 김창남 대평리 이장님도 자랑스러우셨는지 이날 현장을 찾은 제게 가장 먼저 배씨를 소개시켜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제주 곳곳의 마을들은 여전히 농업에 생활기반을 두지만 그 비중이 육지 마을의 그것보다는 훨씬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 대평리와 같은 해안가의 마을들은 특히 그러한데, 식당·카페·숙박업 등에 도전할 수 있는 제주 특유의 환경 덕에 비록 규모에서 부침은 있을지언정 이주민의 유입이 끊이지 않고 있죠. 

인원의 수도 수지만, 무엇보다도 그 성격에 ‘농업’의 요소가 거의 없다는 게 육지와 가장 다른 특징일 것입니다. 자연스레 기존의 문화와 관습을 두고 여기저기서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충돌 여부를 떠나 기존의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는 비농업인구가 많아질수록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도 하죠. 마을의 입장에선 어떻게 해야 농업·농촌에 전혀 관심 없는 새로운 주민들과 기존 주민들이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평리만 해도 300세대가 조금 넘는 가구 수에 550여명이 사는데, 이장님 말씀으론 가구 수로는 여전히 농가가 두 배 정도 많지만 주민 수를 기준으론 이주민의 수가 더 많아진 지 오래라고 하네요. 이들을 찾는 도시 관광객들까지 생각하면 실제로 느껴지는 마음의 거리는 더욱 멀 것입니다.

 

반나절의 힘겨운 작업이 끝나자 대평포구로 향하는 멋진 돌담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반나절의 힘겨운 작업이 끝나자 대평포구로 향하는 멋진 돌담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두고만 보고 싶지 않았던 이장님이 올해 초 취임하자마자 떠올린 게 바로 이 돌담 쌓기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우리 농업유산이 점점 훼손되는 가운데 주민들 스스로 복원에 나섰다는 사실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원주민과 이주민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활동을 발굴해 공동체의 화합과 발전을 꾀했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제주 마을들은 ‘공심(公心)체’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이제 서로 마음을 모으는 공동체를 다시 만들어야 할 때라고 봐요.”

대평리는 지금도 아름답긴 하지만, 새로운 경관을 내세우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 테니 관광업에 주로 종사하는 이주민들 입장에서는 당연지사 반가운 소식이겠죠. 달리 보면 원래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이주민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 셈인데, 온전한 마을공동체를 향한 열망과 서로 함께하기 위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 시도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직은 구상 단계에 불과하지만, 대부분 곧 고령에 들어설 농민들이 로컬푸드의 형태로 특산품을 판매하게끔 마을사업도 이어서 펼칠 생각이라고 하니, 제주 마을공동체 복원의 새로운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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