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오래된 미래, 할머니 농부

  • 입력 2021.05.23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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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버스 정류장에서도, 밭에서도 모이는 곳마다 작물 이야기가 한창이다. 무엇을 심었는지, 어떻게 자라는지, 날씨가 어떤지 농번기에는 촌에 오로지 식물 이야기로 꽉 찬다. 농사를 제대로 지어보라는 듯 자신감을 심어주는 새싹은 본격적인 농사의 서막을 알린다.

관리기나 괭이로 밭을 갈고 두둑을 짓는 여성농민이 오롯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농지는 1,000여평 정도 될까. 물론 사람 손이나 트랙터의 힘을 빌린다면 말이 달라지니 여성 농민의 가계 규모가 천차만별 다양하겠지만, 당최 농사만 지어 여유롭게 먹고 사는 그녀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시골에는 혼자 지내시는 할머니들이 제법 계시는데, 촌에 여러 품일도 마다하지 않으시면서 당신 밭도 틈틈이 농생태학적으로 대물림해온 씨앗을 호미로 괭이로 심고 거두시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할머니들의 농업과 관련하여 농업기술센터에서 어떤 예산이라도 집행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마을에 할머니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농작물은 없을 것이다.

그 할머니들을 부리는 농장주는 여러 농-창업과 관련된 지원 사업을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할머니들은 집에서 점심을 싸오셔서 일당에 식비 5,000원(7,000원도 안된다)을 현금으로 받으며 주말 없이 매일매일 성한데 없는 다리, 허리와 여러 관절들을 끌고 이 밭, 저 밭에 작물을 심고 거두신다.

그렇게 애써 모은 돈으로 오랜 시간 지역농협에 맡겨 오신 할머니들 중에 농협 조합원이신 분은 얼마나 계실까, 조합장 선거에 투표를 하는 할머니는 몇 분이나 계실까? ‘할머니, 농업기술센터 가보신 적 있으세요? 밭에서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일을 이끌어주시는데, 왜 군청이나 면사무소 가시면 말씀을 아끼세요?’ 할머니의 발과 목소리를 묶어두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젊은 시절부터 뼈 구부러지게 애쓰셔서 사람들의 먹거리를 만들어 공급했으니 노년에는 좀 쉴 수 있게 노후를 보장받아야지, 먹거리를 재배하는 농민이 먹고 사는게 힘들다는 말을 죽을 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다니… 아이러니하다고 따져 묻고 싶다.

이제는 전통이라는 이유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졌는데, 할머니들은 저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들과의 삶과 크게 달라지신 게 없는 것 같아 서글프다. 마을회관에 살림살이는 왜 할머니들만 할까, 할머니는 이장 하면 안된다는 법이 없는데, 왜 꼭 남자를 밀어줄까.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변화의 조짐은 까마득하지만, 요즘 시대라면 어느 순간 툭 끊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관행들. 가까운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호된 시가살이를 겪으셨다고 치를 떨며 그 시절 이야기를 전해주셨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대에서 강단있게 끊어내어 그 집 며느리는 8년 시가에 살면서도 그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여 겪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 할머니들 얼굴을 마주할 때면 내 앞날을 슬그머니 비춰본다. 아마도 계속 이 길을 걷다 보면 할머니들처럼 손도 재발라지고, 뼈마디도 굵어지고, 하늘과 작물의 말도 더 잘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땅도 더 포슬포슬하게 만들 수 있을 테고, 키질도 잘하고, 도리깨질도 리듬감있게 탕탕 칠 수 있겠지,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무엇보다 할머니들처럼 서로를 벗 삼아 삼총사, 사총사로 의리있게 품일도 같이 다니고, 밥도 같이 먹고, 고스톱도 같이 치는 그런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장날에 장터와 버스 정류장을 가득 메우는 할머니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는 여전한데,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공적인 자리에서 우리 할머니들의 존재감을 느꼈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억척스럽게 몸을 갈아 넣어 작물과 자식을 키우는 여성농민이라는 이미지로만 남아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할머니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었나? 할머니들의 삶이 농촌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왔는데, 그만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꽤 수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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