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임차농 탈출기

  • 입력 2021.05.23 18:00
  • 기자명 김석봉(경남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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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경남 함양)
김석봉(경남 함양)

“이거 큰일이네. 이제 어떻게 해요?”

마당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걱정스런 말투로 나를 맞았다. 읍내 군청과 농어촌공사 사무실과 농협을 다녀온 나의 어깨도 푹 처져있었다.

“그러게, 어찌해 볼 도리가 없네. 다들 안 된다고만 하고.”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정말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필경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농지가 나왔다. 660평, 서 마지기가 조금 넘는 마을 앞 산언저리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논이었다. 서너 해 묵혀둔 탓에 메마른 풀이 우거져 볼품없지만 산골 농지로는 제법 널따란 것이 잘 갈아엎기만 해도 쓸 만할 듯했다.

귀농 14년 만에 우리는 처음으로 이 농지를 구입하려 했다. 지난해 집을 고치느라 푼푼이 모아둔 돈을 다 썼지만 여기저기 알아보니 농지구입자금을 대출하는 정책이 있고, 그런 정책을 시행하는 지자체도 있다는 말을 들어 어떻게든 이뤄지리라는 생각에 일을 시작해버렸다.

멀리 사는 지주와 흥정을 마치고 계약날짜를 정했다. 그리고는 당당히 집을 나서 읍내 가는 버스를 탔다.

지금은 2,000평에 조금 못 미치는 농지를 임차해 유기농소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지만 마침내 우리 농지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농부로서 자기 농지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기운 나고 멋진 일인가.

읍내로 나가는 내내 설레는 가슴 한편으로 지난날이 떠올랐다. 몇 년 농사지어 땅이 폭신폭신하고 거무스름하게 좋아졌을 무렵 밭주인이 그 밭을 뺏어버렸다. 한 마디 항의도 못 해보고 나는 다른 농지를 찾아야 했다.

심지어는 밭을 빌어 퇴비 200포를 지게로 져 날랐는데 갑자기 안 빌려준다고 해 다시 그 퇴비를 지게로 지고 나온 적도 있었다. 임차농의 서러운 경험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군청 농업기술센터를 들어서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담당공무원을 만났다.

“우리 군에는 농지구입에 대한 보조나 지원제도가 없는데요. 시설이나 농기계구입자금은 가능하고요.”

서너 쪽쯤 돼 보이는 문서를 들고 탁자에 마주 앉은 담당공무원의 대답은 이랬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지자체 정책에 농지구입자금도 융자나 대출이 된다고 해서 찾아왔다는 나의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로 취급되었다.

농업기술센터를 나오는데 눈앞이 하얘지는 것이었다. 어딜 가도 안 될 거라는 불길한 생각에 발걸음이 휘청거리는 듯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농어촌공사 지부 사무실이었다.

“우리 공사에서는 이런 농지에 대해선 구입자금 대출을 해줄 수 없어요. 우리 공사는 절대농지, 경지정리된 농지만 구입자금을 주선해 드려요.”

내가 사는 곳은 산골이라 경지정리 된 논은 구경할 수조차 없는데 우리 같은 소농은 어쩌란 말이냐는 항변도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처럼 무용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막막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에 이쯤에서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농협중앙회지점 대출창구를 찾았다.

“구입할 농지의 감정가 최대 60%한도 내에서 대출을 해드릴 수는 있어요. 담보대출인 셈이죠.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산골짜기 농지를 담보로 대출을 해주는 일이 마뜩잖은지 창구 직원은 얼른 상담을 마치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역농협 조합원이면 그 지역농협에 가서 대출을 받는 편이 훨씬 유리할 거라며 내쫓다시피 했다.

지역농협에 와서 꽤 높은 이율로 신용대출을 받고서야 나는 비로소 농지를 가진 농민이 되었다.

전국 곳곳에선 개발예정지구 농지를 가지고 온통 투기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볼썽사나운 패악질 속에서 정작 농민이 농지를 가지기가 그리 쉽지 않은 이 나라의 농정이 불안하다.

농지는 당연히 농사를 짓는 농민이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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