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옆에 선다”며 농촌 들녘에서 문 연 법률사무소

충남 홍성군 운월리서 개소식 연 '공익법률센터 농본' 이야기

  • 입력 2021.04.27 16:17
  • 수정 2021.05.02 18:19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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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개소식에서 출입문에 현판을 단 뒤 웃음 짓는 그 구성원들입니다. 왼쪽부터 장정우 정책팀장, 이상선·이상훈 운영위원, 하승수 대표.
개소식에서 출입문에 현판을 단 뒤 웃음 짓고 있는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구성원들입니다. 왼쪽부터 장정우 정책팀장, 이상선·이상훈 운영위원, 하승수 대표.

농촌사회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다뤘던 문제는 역시 개발·자본우선주의에 의한 농민권리의 침탈이 아니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핵심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본에 잠식돼 버린 법과 제도로, 농민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경작과 거주의 권리, 공동체를 이룰 권리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빼앗는데 일조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폐기물처리장, 산업단지, 신도시, 신공항, 송전탑, 기업형 축사, 공공체육시설(을 가장한 골프장), 그리고 최근엔 태양광발전소까지. 돈을 좇아 농지를 빼앗고 기피시설을 지으려는 자본의 진출 사례는 매년 수도 없이 이어졌고, 이에 딱히 대항할 수단조차 없어 겨우 언론사(그나마도 주류 언론 대부분은 관심을 갖지 않는)에 기댈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처지는 매번 안타깝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운월리 한 들판에서는 그런 농민권리 침해를 전문으로 다루는 법률사무소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 하여 ‘공익법률센터 농본’으로, 이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고 때론 나서서 돕던 한 변호사가 오로지 컨테이너 한 동을 갖고 만든 의미 깊은 공간입니다.

 

피해 주민들이 기증한 컨테이너로 개소

오랜 시간 시민활동가로 곳곳에서 사회개혁의 큰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던 하승수 변호사는 현재 농촌, 홍성군 홍동면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 직함이 있지만, 최근 들어 가장 알려진 것이라면 국가기관의 씀씀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 ‘세금도둑잡아라’의 공동대표가 아닐까 싶네요.

지난 해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 폐기물매립장 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자문하며 농민들이 반대와 대응의 논리를 세우는데 도움을 준 그는, 그 과정에서 오로지 농민의 편에 서서 마을공동체를 지원하는 공익법률센터의 필요성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무소가 농촌 안에서도 읍이나 면소재지가 아닌 들녘에 자리한 것도 농민의 옆에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를 만드는데 사용한 컨테이너 또한 오두리 대책위가 사용하던 것을 기증받은 것인데, 문 안쪽에는 ‘천수만을 지키자, 폐기물장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아직도 걸려있습니다.

“저희가 솔직히 시골에 살고, 젊은 사람도 없고 하니 법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하 변호사님은 전부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결국 금강유역환경청에서 부동의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업체와 소송을 하든 뭣을 하든 어렵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역 주민들이 좋은 명분을 가지고 함께하면 어떤 싸움이든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전기룡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 폐기물매립장 대책위원회 간사).”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사무소 전경. 홍동면 주민들과 전국 각지의 주민대책위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운월리의 들녘이 배경으로 자리한 개소식의 모습입니다.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사무소 전경. 홍동면 주민들과 전국 각지의 주민대책위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운월리의 들녘을 배경으로 열린 개소식 모습입니다.

‘농본주의’ 품고 농민 옆에 서다

사무소가 위치한 홍동면의 주민들, 곳곳에서 싸우는 농촌의 대책위 관계자, 시민사회 활동가, 그리고 지역 언론인 등 50여명이 찾아온 개소식은 농민을 위한 법률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동체다운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지역 풍물패가 등장해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가 하면 하 대표가 지은 이름 ‘농본’을 가지고 이행시 짓기를 이어가기도 했죠.

하 변호사 본인의 시간보다 참가자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마이크를 잡는 시간이 더 많았던 개소식에서, 농본의 성격과 방향을 알리는 순서 또한 한 농민에게 시와 글을 부탁하는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녹색평론’의 초대 편집장을 지내고 지금은 홍동면에서 농사짓는 장길섭 선생은, 그 이름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지만, 이 사무소의 근원이 고 김종철 선생의 ‘농본주의’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 속에서 오늘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비영리 공익법률센터 농본은, 농본사상가 김종철 선생님의 사상과 실천을 계승하여, 농촌과 농민과 농사를 옹호하고,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농촌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운동조직입니다. 저는 농본이 30년 전에 시작된 녹색평론 만큼 중요한 시민운동단체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김종철 선생님이 마련해주신 이 터전에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 농본의 활동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오늘 참석해주신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적극 참여해 힘을 보태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할 일이 산더미,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농본의 업무는 단순히 법률 자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농업·농촌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결국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고, 농본 역시 이를 위한 활동에 힘 쓸 생각입니다. 그 활동에는 필시 많은 조사와 연구가 동반돼야 할 것인데, 다행스럽게도 농본은 이를 뒷받침할 운영위원(이상선 충남시민재단 이사장·이상훈 변호사)과 젊은 활동가 두 사람을 구했습니다.

홍성 출신으로, 앞으로 자신의 농사일과 더불어 농본 정책팀장 업무를 병행할 청년농민 장정우씨는 홍동농협과 협조해 최근 5년 새 실제 벼 수확량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통계청의 조사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제안을 할 계획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최근 이슈가 된 농지의 부재지주 문제와 관련해 국회의원 보유 농지를 조사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 발을 내딛는 농본에 대한 후원이 절실하다며, 더 많은 사람들이 활동에 참여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할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는데 그러다 마침 하 변호사님을 만나게 됐어요. 저도 작지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네요. 기사가 나가자마자 전화가 엄청 왔는데, 폐기물 처리 관련 건만 네다섯 개에 장기 연구 사안들도 있어요. 농지법이나 기후위기로 인한 생산량 감소 등이죠. 예를 들면 통계청에선 지난 해 벼 수확량이 6% 줄었다고 하는데, 홍동에선 20%가 넘게 줄었어요. 말도 안 되는 기반을 가지고 정책을 만들면 제대로 나올 수가 없잖아요. 제대로 된 정보를 쌓기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일꾼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4일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개소식에서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고 있는 하승수 변호사.
지난 24일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개소식에서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고 있는 하승수 변호사.

하승수 대표 “지키고자 하는 힘, 파괴하고자 하는 힘보다 강하다”

개소식은 이제야 했지만, 사실 자문 활동은 오두리를 시작으로 한참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 변호사에 따르면 이미 다루고 있는 현안만 10건을 넘는 데다, 활동이 알려진 이후로 문의가 쇄도하는 만큼 더 늘어날 것 같다고 하네요. 바로 얼마 전에도 전라북도 김제시에 들어설 산업폐기물매립장 문제로 주민들이 찾아왔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농촌공동체가 위기에 놓여있는지 짐작 가능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농본은, 농민들과 힘을 합쳐 ‘농’촌을 파괴하려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겠지만 앞으로 쉽지 않은 과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큰 자본의 힘과, 무능·무책임한 정치와 행정이 농촌의 마을공동체를 굉장히 위협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우리의 힘은 미약합니다. 그래도 우리의 지키고자 하는 힘이 파괴하거나 무너뜨리고자 하는 힘보다는 강하다고 생각하기에 함께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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