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펜팔⑤ 펜팔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 입력 2021.04.2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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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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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팔은 펜팔로 끝나야 펜팔답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미지(未知)의 처녀 총각으로 시작했다가, 평생지기 반려가 된 경우를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저희 이모는 서울 토박이고요, 이모부는 부산에 거처를 두고 원양화물선을 타던 마도로스였어요. 물론 펜팔로 소통을 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됐지요. 이모부가 세 살이나 연하인데도 워낙 오랫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받아서인지, 처음 만났을 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라고 하시더라고요. 만난 지 두 달 만에 웨딩마치를 울렸다니까요.”

2001년에 PC통신 동호회에서 만난 한 여자 회원이 들려준 얘기다.

총각 쪽이 원양을 항해하는 선원이었으니 편지 쓸 거리는 또 오죽 많았을까. 보나마나 남자가 보낸 편지에는 끝 간 데 없이 막막한 수평선이며, 마도로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갈매기 울음소리, 게다가 집채 같은 파도를 헤쳐 나아가는 사나이의 기백…운운하는 사연들이 구구절절 상당히 과장되게 표현돼 있었을 것이다. 뭍의 처녀는, 편지에 담긴 그 이국적인 정취에 꿈꾸듯 반했을 것이고.

사춘기 중고생들의 경우도 편지가 예닐곱 차례 오가다 보면, 주로 남자 쪽에서 조심스럽게 한 번 만나자고 제의를 한다. 여학생이 제의에 응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오면, 다시 남학생이 시간과 장소를 적어 보내고, 그 조건을 수락하겠다는 편지를 여학생 쪽에서 다시 보내오고 나서야 약속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기도 했다. 강필규 씨의 경험담이다.

-야, 준수야, 홍준수! 부탁 하나만 하자. 지난 가을에 경주 수학여행 가서 쪽지 나눠줬다가 펜팔 친구로 사귀게 된 여자애 얘기, 너한테도 했잖아?

-아, 인천 산다는 그 박수진이 말이지? 그런데 왜, 그만 헤어지기라도 하재?

-헤어지기는. 내일이 토요일이잖아. 세 시 반에 파고다(탑골)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우와, 진도 빠르네. 축하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니까.

-무슨 문제? 입고 나갈 사복이 없어서 그래? 내가 빌려줄까? 아님, 빵 값 좀 보태줘?

-그게 아니고, 시골 계시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고 연락이 와서, 내일 오후에 식구들이 전부 내려가야 하거든. 그런데 처음 만나기로 한 여자애한테 바람맞힐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대신 나가서, 나한테 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얘기 좀 해주고 오면 안 되겠냐?

-뭐, 그런 사정이 생겼다는데 모른 척 하면 친구가 아니지. 야, 그런데 어떻게 생긴 여자앤지를 알아야 만나든 말든 할 거 아냐. 예쁘게 생겼냐? 사진은 주고받고 했을 것 아냐.

-까불지 말고, 세 시 반에 손병희 선생 동상 앞으로 가면, 하늘색 원피스 차림에다 오른손에 ‘데미안’이라는 소설책을 들고 서 있는 여자애가 있을 거야. 그 여학생을 찾으면 돼.

-알았어. 오케이! 그 앙드레 지드의 ‘데미안’ 말이지?

-아이고, 이 무식한 놈아, 앙드레 지드는 ‘좁은문’이고, 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이다 이 맹추야.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는데 어이구, 이래가지고야 원.

어쨌든 이렇게 해서 강필규는 펜팔 친구와 처음으로 만나기로 한 그 역사적인 자리에 학교 친구를 대신 내보냈다는데…어떻게 됐을까?

“치명적인 실수였어요. 홍준수라는 그 친구 녀석이 무식하긴 해도 얼굴이 아주 잘 생겼거든요. 키도 훤칠하고. 아, 그 녀석한테 부탁하는 게 아닌데…. 그 뒤론 편지를 해도 답장도 안 오더라고요. 죽 쒀서 뭐 준다고…뺏긴 거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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