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펜팔③ 답장은 안 와도 쓰고 또 썼다

  • 입력 2021.04.1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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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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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엔 거의 대부분의 대중잡지들이 뒤쪽에 펜팔 난을 따로 두고 있었다.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주소 정도만 간단하게 싣는 잡지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잡지의 경우 취미에다, 혈액형에다(전투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도 아닌데 혈액형을 왜 표시했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이성 친구의 조건을 함께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펜팔을 연결해주는 매체는 잡지만이 아니었다.

“그때 기독교방송에서 저녁 일곱 시에 하던 ‘세븐틴’이라는 청소년 대상의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개그맨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고영수 씨가 진행을 맡았는데, 방송 말미에 펜팔 신청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불러줬거든요. 받아 적기 쉽게 또박또박….”

1958년생 김경식 씨가 들려준 얘기다. 청소년 대상의 방송이 아니더라도, 펜팔 희망자의 인적사항과 간단한 사연을 소개해 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여럿이었다. 이런 식이었다.

-자, 이제 마칠 시간이 다 돼 가네요. 마지막으로 한 명 더 소개하겠습니다. 충청도 보은에서 최영순 씨가, 펜팔을 통해서 우정을 나누고 싶다고 엽서 보내왔네요. 신청곡은 키보이스의 ‘정든 배’입니다. 최영순 씨의 정확한 주소는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가지고 밭에 나가서 부모님과 함께 고구마밭고랑의 김을 매던 최영순은, 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호밋자루를 내던지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라디오방송에 이름이 나왔다고 그저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일주일쯤이 지나자 하루에도 열대여섯 통의 편지가 집안으로 날아들었고…발신인이 모두 남자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아버지로부터,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연애질이냐는 호통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 자신의 신상을 공개된 자리에 내놓기를 상대적으로 더 꺼려했기 때문에, ‘펜팔 중개소’는 언제나 남자들로 넘쳐났다. 그래서 보다 확률이 높은 다른 수단을 궁리하게 되는데,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여학생을 하교 길에 직접 따라붙는 방식이었다.

-저, 잠깐만요, 박용심 학생이지요? 저는 옆 동네 사는 이송민인데, 할 얘기가 있어서….

-깜짝이야. 그런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명찰을 안 떼고 달고 있잖아요. 아, 그러니까 다름이 아니라….

-왜 자꾸 따라오고 그래요. 엄마!

여학생이 골목길로 부리나케 달아나더니 대문을 여닫고 들어가 버린다. 그렇다고 돌아서버리면 사내가 아니다. 수첩을 꺼내 주소를 적는다. 물론 문패에 새겨진 호주의 이름까지.

이제 며칠 뒤부터 그 여학생은, 봉투의 수신인 난에 ‘박봉남 씨 댁 박용심’이라 적힌 남학생의 편지를 받기 싫어도 받아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여학생이 남학생의 편지 내용에 호감을 느껴서 답장을 함으로써, 둘 사이에 펜팔이 성사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사례도 염두에 둬야 한다. 어느 날 여학생의 아버지가, 개봉도 안한 편지꾸러미를 들고 남학생의 집으로 쳐들어와서는 ‘자식 교육’ 운운하며 식구들 앞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경우다. 서울 혜화동 출신의 이송민 씨(1956년생)가 그런 봉변을 당했었다.

그렇다고 좌절할 소냐. 경주 수학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이송민군은 밤을 새워가며, 명함 크기로 자른 수십 장의 종이에다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정성껏 적는다. 수학여행 둘째 날에는 천마총 견학 일정이 잡혀있는데 시즌이 시즌인 만큼, 여학교의 견학행렬과 반드시 만나게 돼 있다는 경험담을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가을철 경주 수학여행에서 여자애들한테 주소를 ‘뿌렸다가’ 답장을 세 통이나 수확했다”는 사촌형의 무용담도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하여, 남학생들에게 펜팔은 끊임없는 도전의 길이기도 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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