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쇠고기미역국 타령

  • 입력 2021.03.28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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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잦은 비로 논밭일을 쉴 때가 많은 이즈음에 마실갔다 집으로 오니 웬 선물상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마른미역 한 봉지와 쇠고기가 들어있었습니다. 뭘까 생각해보니, 축협에서 남편 생일이라고 기념선물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우리 지역은 몇 해 전부터 축협조합원 생일에는 쇠고기미역국 선물세트 배송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겨우내 지겹게 먹던 굴미역국 대신 오랜만에 쇠고기미역국을 끓여 먹으려니 기분이 살짝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그럼 난 뭐야? 나도 가끔 소한테 사료를 주기도 하고, 눈도 맞추고, 부산물 나오면 소부터 챙기는데 왜? 라는 생각에 미쳤지만, 사실 이것은 억지고 우리 집처럼 퇴비생산을 위해 애완소를 키우는 집이야 남편만 돌봐도 충분합니다. 예전처럼 같이 쇠스랑으로 퇴비를 내지도 않고, 그야말로 예쁘다고 소 이마를 쓸어주는 일 외에는 크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축협 조합원이 아니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니 크게 원통할 일도 없다만, 이웃 마을 축산 여성농민의 상황으로 보자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 친구는 축사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100두 이상의 번식우를 키우는데 폐사율 0%를 기록하는 알뜰 농사꾼입니다. 아까바네병(어미소가 모기에게 감염되어 관절질환과 사산 및 유산하는 질환)이 걸려 태어난 송아지도 뜨거운 물로 마사지를 해서 살려내고, 겨울철 호흡기 질환에 걸리거나 설사하는 송아지도 식염수를 공급하고 분유를 먹이는 등의 노력으로 끝내 살려냅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어김없이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받아와서 먹이고, 그걸로 축사를 소독해서 냄새도 안 나게 철저하게 방제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그녀의 손에 달려 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축협조합원이 아닙니다. 축협조합원이 되려면 평균출자금 600만원 이상을 내야 하니까요. 그러니 그렇게 큰 농장의 알짜배기 역할은 다 하는 그녀는 축협으로부터 인정받는 요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정은커녕 관계 맺는 일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성농민이 평균출자금의 문턱을 넘어 조합에 가입하더라도 현재의 경영구조는 그야말로 눈뜬 사람, 대개 남성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현재 조합원 30%를 자랑하지만 실은 승계를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고, 이분들이 단 한 번의 경험도 없이 공적인 자리에서 농협 경영을 고민하고 참여한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법 제도에 떠밀려서 한 명의 여성 임원을 만들어 내면? 그래도 경영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쳇말로 ‘여자들이 뭘 잘 몰라서’가 아니라 조심, 또 조심하는,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그 문화에서, 자유롭고 호기롭게 제안하고 비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세 사람이 모여도 스승이 있다 했던가요? 게다가 세 사람만 모여도 노래 잘하는 한 사람이 꼭 끼어 있더란 말입니다. 사람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남성에게만 국한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무수히 봐 왔습니다. 세 명의 언니들을 만나도 그중에 책임감 강하고, 야무지고, 통찰력 있고, 크게 멀리 보고 그래서 딱 지도자감인 언니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농사도 잘하고 살림도 깐지게 살고, 심지어 가족이나 주변과의 유대관계도 좋더란 말입니다. 딱 하나, 남 앞에 서는 것에는 조심스러워하는 문제를 빼고는 상당히 멋진 언니들이 곳곳에 있더란 말입니다. 사실 남 앞에 서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덕입니다. 진즉부터 여성들은 다소곳할 것을 세상이 주문해 오지 않았던가요? 이런 분들을 여성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하려면? 배려와 상생의 원리를 농협 경영 전반에 내세워야죠. 그러면 농협더러 수수료 장사나 한다고 하는 불만이 싹 사라지겠지요? 쇠고기미역국 선물세트 따위에도 마음 상할 일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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